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21.05.13 11:14

성령 안에서 새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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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주제가 정치와 사회 문제로 전환되면서부터 모든 대화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친분 여하와 상관없이, 대화 시간이 길어지면 상이한 견해 차이로 골이 깊어지고 틈이 넓어지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문제투성이로만 보고 있지 않나 싶어질 때가 많습니다.

작은 애벌레에게는 모든 것이 다 문제이죠. 지나가는 길에 놓인 돌덩이도, 물구덩이도, 막대기도 다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구경거리입니다. 그런데 나비는 바로 애벌레가 변화된 거잖아요.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문제를 치워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은 인간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아닌 자기의 의로움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면 문제인 그 모든 것이 문제 덩어리가 아닌 즐길 것이 됩니다. 이를 신앙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하느님의 영으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려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주님 안에서 변화되면 문제나 장애가 이젠 문제나 장애가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구경거리로 변한다는 이 거듭남의 신비,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의 실현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소서.’ 이 환호성은 부활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갈망의 외침입니다. 이 환호성에 내포된 바램은 천진난만(天眞爛漫), 본래면목(本來面目)에로 회귀하라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봅니다. 새롭게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이 부르심을 살아가도록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사실 변화는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더더욱 새롭게 거듭난 상태를 지속 유지하기란 더 어렵습니다. 삶을 통해서 느끼고 깨닫지만, 인간의 변화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변화할 수 있는 요인들을 들자면 제 경험에 의하면, 첫째는 교육이고, 둘째는 고통이며, 셋째는 사랑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육은 투자 대비(=시간의 양)에 비례해보면 결과는 미미하고 시간이 많이 요구됩니다. 당장에 결실을 얻기란 힘듭니다. 둘째로, 고통은 그 고통만큼 어렵고 힘들지만, 고통을 겪고 난 후 많은 성장과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때론 부정적인 면으로 변화는 경우도 있지만, 고통은 자신의 틀을 벗고 변화하게 하는 하느님의 탁월한 교육 방법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가장 고통을 많이 주는 사람이 때론 가장 변화를 많이 하게 하는 도구이며 연장이기도 하는 게 제 인생의 경험입니다. 저의 개인적 견해이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고통에 대한 영적 내구성이 더 강한 까닭은 유전적 요인과 출산에 따른 고통에 있다고 봅니다. 출산의 고통을 겪은 여성, 어머니는 고통에 대한 내구성 시험을 통과했기에 흔히 말하는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표현이 타당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자녀를 낳은 여성은 분명 인간적으로나 영적인 면에서 거듭나게 되고, 성장과 변화를 체험하였다고 느낍니다. 셋째로, 인간적인 사랑의 체험이나 신앙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분명 변합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성서의 인물(=사마리아 여인, 치유받는 사람들 가운데 하혈병을 앓았던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 등등) 들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체험은 우리를 변화하는 가장 아름다운 원동력입니다. 대 데레사 성녀의 표현처럼, 정원사가 정원에 물을 주기 위한 인간의 노력(=두레박)은 하늘에서 쏟아진 비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 은총과 그 크기와 넓이, 높이와 깊이에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와 같이 사랑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변화입니다.

오순절 기사(사도2,1-41)에 묘사된 다락방의 이미지는 단순한 공간만을 의미하기보다는 사도들의 두려움에 닫힌 내적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다락방은 모태처럼 새로운 인간, 영적 인간의 탄생을 위한 영적 태(胎)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거듭나기 위한 성령강림의 시간이 필요했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도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태어나기 위한 영적 수태 기간이 필요하며, 세례성사를 통해서 자동적으로 성령을 받고 성령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세례성사를 받았기에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신자가 성령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잘 표현되었지만, 초대 교회의 관심사는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 효과에 있었습니다. 초점은 바로 성령강림을 통해서 사도들은 비로소 온전히 예수의 인격과 행적에 대한 이해와 함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실 때 그분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아들, 주님>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도 위령을 본 듯 겁에 질려 믿지 않았습니다. (Mr16,13.14참조) 부활 이후 성령을 받음으로써 제자들은 스승의 인격과 행적 그리고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Jn2, 22;12,14-16참조) 제자들의 새로운 이해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로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Jn14, 26) 따라서 성령은 예수의 인격과 행적을 바르게 비치어 나타나게 하는 영입니다. 예수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전달하는 그분이십니다. (사도2, 33: 요한16,13-14)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에 대하여 무관심할 때, 우리는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며,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의 진리와 자유를 열어 주며 이끌어주는 영을 우리는 예수님과 상관없이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약성서에선, 하느님의 영이 예수와 불가분의 관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더 나아가서 우리는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요한 20, 19-23에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부활하신 다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되돌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 이 인사말은 제자들의 배신과 잘못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끝내 원한을 품지 않은 마음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찾아오시고 평화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선물인 이 평화는 바로 성령이시며, 평화의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아울러 당신의 상처 난 손과 옆구리의 상처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확고부동한 사랑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랑의 영원한 표지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인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한 삶,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Jn3,16;10,10) 성령은 그리스도인을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 생명과 사랑이 충만한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된 삶으로 인도해 주시는 고마운 분이십니다. 따라서 저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다음과 같다고 확신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비우는데 있다. 성령께서 내 마음 안에 머무실 자리를 내어드리는 일, 이 보다 더 근본적인 일이 없다. 성령께 자리를 내어 드려라!!> 성령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제3의 위격位格으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파견되시어 삶과 죽음과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 분이시라면(=구원 운동), 성령은 구원된 인간과 세상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끄시는 협조자이시며 인도자이십니다.(=귀환 운동) 이러한 성령을 성서는 물 <=요한7, 37-38; 영적 갈증 해소, 생명 유지, 정화 기능>, 불 <(=마태3, 11; 사도 2,3; 뜨거움 (열절한 사랑, 뜨거운 신앙)-빛(신앙의 어둠에서 비추어 줌)>, 기름 <=1사16,13 ; 성별(물건, 사람 축성), 투사들 기름 바름(=사탄의 공격 피하고 싸울 준비), 윤활유(부드럽게 만듦)>, 바람 <=요한3,8; 강함(쓸어버림)-부드러움(신선함과 자유로움) -신바람(신명나게 함, 세상의 기운)> 등으로 상징하여 가르치고 있는데 이 모든 상징은 성령의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특성을 통해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우리를 밀접하게 맺어줍니다. 예를 들자면, 종이 위에 쇠붙이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자석을 가지고 두드리면 흩어져 있던 쇠붙이들이 서로 이끌려 한데 모여 한 덩어리가 됩니다. 이때 자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자장은 성령의 활동이고 쇠붙이는 바로 우리 자신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무식하고 겁도 많았던 사도들은 성령강림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성령 충만과 충만한 성령의 활동으로 새롭게 변모된 사도들의 체험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사도행전은 끝이 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성령 안에 새 생활을 통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바로 성령의 시대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으로 살고자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그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고 의식적으로 평화로우며 앙심을 품지 않은 마음으로 살아야 만이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인격과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과 힘은 그분의 더없는 자비와 압도적인 호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영은 사랑과 인자의 영, 자비와 용서의 영으로써 우리네 삶의 기준이 되는 힘이기에 우리의 생각과 판단, 말과 행동에 있어서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행의 영인 이 성령께서 역사하실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는 생명이지 죽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 실존은 생사의 선택과 결단의 과정이며, 그 과정에 생생한 실존과 삶이 놓여 있습니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신명30,15) 바오로 사도는 이를 그리스도 신자들의 삶, 영성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이기주의, 인간차별과 인간경멸, 탐욕, 우상숭배 등)을 배격하고 생명(사랑, 자유, 진리, 정의와 평화 등)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음으로, 1) 현존 의식 깨우침 (1요한 3, 24b): 하느님 현존과 사랑을 체험함으로 <‘아니 계시다’에서 ‘하느님은 어디서나 항상 함께 계시다’>로 인식과 의식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2) 자녀로 만들어줌 (로8,15):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정情이 통하게 함; 천국 가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는 게 우선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하느님 계시는 천국은 자연스럽게, 무상의 덤으로 받고 누리게 됩니다. 자녀인 우리를 제치고 남에게 유산을 줄까 걱정하지 말라! 당신은 사랑받는 아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함 (1코12,3):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인들은 소유권을 주님께 맡김 즉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존재입니다. 가끔은 한쪽 구석으로 밀쳐내서 주님을 머슴 취급하지만. 주인을 주인으로 알아 뫼시고 우리는 한낱 그분의 청지기일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4) 진리가 아닌 허상, 죄를 자각하고 통회하며, 진리 깨닫고 실천함 (요한16,8-9;16,13:로마 8,13): 제가 만났던 어느 서양 비구니께서 말씀하시길 “깨달음은 달리 말하면 변화하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은 존재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는 진리의 눈뜸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는 곧 사물과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5) 친교를 이루어줌 (2코 13,13): 이로써 인간관계의 부드러움, 기억의 치유를 할 수 있습니다. 6) 기도 생활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에6,18): 자유기도, 감사 및 찬미 기도 늘어나고 오래 기도하며 기도가 깊어집니다. 아울러 성서를 더 많이 알고 싶고, 많이 읽게 되어 성서에 맛 들이게 되고 새로운 말을 배우게 됨, 이상한 언어와 심령기도, 기도 생활을 풍성하게 합니다.

 

이러한 새 생활, 성령 충만한 삶은 예수님을 닮는 삶인데, 예수의 삶에서 나타난 성령의 두 가지 특성은 뒤나미스(Dynamis)와 엑수시아(Exousia)입니다. 뒤나미스는 성령의 內的 活力, 예수의 품성으로 성령의 열매를 말하며, 엑수시아는 外的 活動으로 예수님의 능력 곧 성령의 은사를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은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과거 성령 세미나가 지나치게 은사 중심으로 기울어지면서 많은 무리를 낳았습니다. 예수님의 품성 곧 성령의 열매를 충실히 맺을 때 그에 따라 성령의 은사는 그 기능을 활발히 작용하게 되고 개인적으로나 공동체 차원에서 성장을 가능하게 된다고 봅니다.

요즘 한국 정치의 문제점 중 하나가 지도자에게서 카리스마가 없습니다. 카리스마란 인간의 획득적 덕목이 아니라 천부적인 것, 하느님으로부터 무상으로 공짜로 받은 선물,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교회의 성장을 위해, 구원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그에 적합한 특은特恩, 카리스마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공짜로 받은 은총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구원과 교회 건설 그리고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사용하도록 거저 주셨습니다. 거저 받은 선물이니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저 베풀 때 더 충만히 주실 것입니다. 성서에는 많은 은사가 나옵니다. 오늘 저의 가르침의 주된 초점은 은사 보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라는 사도 바오로의 필리비 2장의 권유대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살아가는 데 우선적인 예수님의 내적 품성의 기초가 된 성령의 열매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간단히 성령의 은사를 요약하자면,

1) 개인 견고의 은사(이사11,1-3): * 지성의 차원슬기(세속적인 것이 아닌 천상적인 것을 사랑하고 추구, 영적인 것에 맛들이게 함), 통달(인간 지력을 통해서 말씀을 깊이 이해하도록 함), 지식(믿고 믿지 말아야 할 진리 아는 것), 의견(행함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는 은혜-선악의 식별); * 의지의 작용 - 굳셈(용기; 신앙의 장애를 극복하는 힘), 효경(하느님께 대한 자녀적 사랑 북돋아 줌), 두려움(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자 하는 마음)

2) 공동 유익의 은사(1코12, 8-10): * 전교 은사 - 지혜(=삶을 살아가는 능력내지 삶의 깨달음,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뜻을 실천적인 말로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나게 함, 면담과 고백성사 때 문제 해결의 실마리 제공, 문제 해결을 위한 적절한 충고와 위기 상황을 고쳐 줌,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도록 해줌), 지식(=신앙 진리 가르치고 설명하고 설교할 때), * 표적 은사 - 믿음(일이나 기도가 이루어 지리라는 확신)

치유 은사 - 육체적 치유 (편작이 와도 못 고치는 病인 제멋대로 행동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 재물에만 욕심이 있어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람, 입고 먹는 생활이 적절하지 않는 경우, 음양이 모두 막혀 움직이지 않고 그 균형을 잃는 경우, 극도의 영양실조로 약 조차 먹을 수 없이 쇠약한 경우,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경우, 성서에는 수많은 육체적 질병에서 치유 받은 이야기 많음); - 내적치유(마음과 기억의 치유—부정적 기억; 낙태의 위험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영향); - 영적치유 (영혼의 병-악습); - 구마 (마귀의 영향에서 해방--육욕, 재물, 교만, 미신행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 기적 (=자연적 은혜를 뛰어넘은 놀라운 은혜로 물리적 기적, 중대한 병의 즉각적 치유 그리고 윤리적 기적으로 믿음과 정신의 완전한 변화);

계시의 은사 -예언(개인, 단체, 공동체를 키워주고 격려하고 위로해 주기 위해 하시는 말씀,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재 초점); -심령예언(이상한 언어로 하느님께서 영적인 깨달음을 위해 하시는 하느님의 활동); - 해석(심령 예언을 요약하고 뜻풀이); 영의 분별(영과 악의 활동을 분별) 교회 안에서 직책이 주어질 때 주님은 방관하지 않고 그에 따른 은사를 주십니다. -- 사도직 은사(=피정에 대한 열정, 공동체를 위해 봉사의 은사(장상직 수용), 서원의 은사나 수도회 은사를 더 잘 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은사 등을 주십니다.

성령은 일치시키고, 건설하는 힘이시며 그 구체적인 능력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 22절에 이를 9개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진복팔단의 기초 혹 핵심이 ‘가난’인 것처럼, 성령의 열매의 기본이자 정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열매의 바탕이며 기초입니다.

1) 사랑: 예수의 사랑은 救援的 사랑이며, 구원적 사랑은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일 곧 사람을 구원하는데, 이 구원은 소극적 구원(=죄에서 구해 줌)과 적극적(하느님 자녀답게 살게함)으로 구분합니다. 아울러 사랑은 잘 생각하고(正思), 잘 말하며(正言), 잘 행동(正行)하려는 내적인 자세, 태도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러한 성서의 예가, 루가 7:11-17절 나인의 과부 이야기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운구에 가까이 가시어 관에 손을 대시고, 입으로 울지 마시오라고 과부에게 친근하고 따뜻하게 말씀하시며, 마음으론 그녀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시며 측은히 여기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마음으로 공감하고, 고통과 기쁨을 이해하는 능력(로12,15)입니다. 선한 말로써 호의를 베풀고 고통받는 존재와 하나가 되게 합니다. 행동으로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는 자신을 내어 주려고 하는 의지(자기 증여 의지)로, 사랑받는 이와 일치에로 들어가는 능력입니다.

2) 기쁨: <하느님께서는 기쁨으로 내주는 사람을 사랑하신다.>(2코9:7) 기쁨은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선물이며, 내주는 것이 기쁨 자체이고 거저 받는 선물에 대한 기쁨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15:11) 기쁨은 우리 안에서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의 기쁨이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의 기쁨으로 영원한 생명이며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친교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사랑받는 기쁨은 삶의 기쁨이며 사랑할 수 있다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환난 가운데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기쁨은 항상 기도와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할 때 넘쳐 납니다.(1테5,17) 우울한 成人은 불행한 聖人입니다. 저는 느낌의 진폭이 큽니다. 저를 포함해서 신자들의 안타까움은 기쁨이 없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보는 것일 것입니다. 사실 저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함박 웃음을 짓습니다. 언제가 어느 피정자가 제게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참 좋으시겠습니다.>고 하자, 제가 <무엇이 좋다는 말입니까?>라고 되묻자, 그녀는 <주님과 함께 사시니까요?>라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며,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얼굴입니다.

3) 평화: (반대는 불안, 초조, 걱정)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평화란 우리를 불안에서부터 보호하는 상태로, 마치 자기 집에 있다는 느낌처럼 익숙함과 가족과 함께 하는 듯하는 편안함입니다. 결국은 참 평화는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집에 있다는 느낌이며, <당신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편안하지 않습니다.>라는 성 아오스딩의 말씀처럼, 하느님 안에 쉬는 것이 마음의 불편함을 부숴 버리는 게 평화입니다. 낯선 사람이나 낯선 곳에서 우리는 뭔가 불편함을 느끼는 데 이는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다만 예전 제가 처음 파푸아뉴기니를 방문했을 때 처음에는 경계심이 일었지만 이내 그들의 따뜻한 환대와 환영을 받으면서 긴장이 풀리고 경계심에서 벗어나 무장 해제할 때, 그 평화는 <새로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평화란 어려움과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요16,33)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사물과 삶을 단순하게 할 줄 알며, 모가 난 것들과 가시가 돋친 것을 부드럽게 하고 분쟁을 화해시키려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교황 요한 23세는 <진리, 사랑, 자유, 정의로 기둥을 세울 때, 평화라는 지붕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4) 인내;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올바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능력입니다. 거두어들일 수확과 결실을 생각하며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끈기롭게 기다린 사람만이 기회가 다가옵니다. 요즘 역주행의 모델인 ‘Rollin의 브레이브걸스’처럼 기다린 자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한 마디로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잘 되어 갈 때가 아니라 곤경에 처할 때 인내의 덕이 요구됩니다. 한국인의 기질은 성급하고 조급하다고 합니다. 인생은 기다림이며 믿음은 바로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게 마련이기에 너무 서두르지 말고 지둘러라야 합니다. 이 기다림은 외적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내적 충만의 때입니다. 때가 됨에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인내는 단련의 결과입니다.

5) 친절: 타인에게 대한 교양, 예의로써 모든 사람 특별히 궁지에 몰린 사람을 편안하게 해줄 줄 아는 태도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친절한 인사는 엘리사벳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긴장을 풀어 주었습니다. 친절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배려이며 타인을 소중한 존재라는 점을 느끼게 하는 예술입니다. 요즘 관공서의 분위기가 예전과 같지 않고 대단히 친절합니다. 매월 친절 사원을 선정한 병원에서 느낀 불친절은 너무 불편하고 힘듭니다. 불친절은 마음의 불편함을 동반하면서 긴장하게 만들고 분위기를 설렁하게 만들어 버리게 합니다. 예전 어느 방송에서 “친절 가게”를 찾아 표창하는 프로그램이 생겨난, 그 바탕에는 그만큼 친절한 가게가 많지 않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친절한 사람이나 친절한 곳을 방문하고 난 뒤, 찾아오는 따뜻함은 받아들여졌다, 인정받았다는 사랑의 여운입니다.

6) 선행;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대한 동의이며 타인의 시선이나 체면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행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남을 이롭게 하도록 일할 줄 아는 사람으로 언행으로 타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타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기적을 행하며, 기쁨을 널리 퍼지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선행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Mt6,3)고 하시면서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손에 맡겨라 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야포 공동체의 도르카스(=다비타)는 자선과 선행을 많이 베푼 예수님의 여제자로써 숨은 선행자이시면서 공동체에 꼭 필요한 존재였기에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녀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베드로에게 간청했습니다. 이처럼 선행자는 공동체가 참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7) 진실; 진실보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과학계도 예전 황우석 논문 조작과 같은 거짓과 가짜가 횡행하고 가짜 박사 논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존재가 되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의 거짓을 압니다. 자신이 한 말에 솔직하고, 그 말과 행동에 책임과 약속을 지킬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요즘 이런 진실한 정치인들과 사회 지도자들을 찾기 어렵습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사는 삶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린 이는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어른들로부터 거짓을 쉽게 배웁니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그 거짓은 남을 죽이기 전에 먼저 본인을 죽게 만드는 독약입니다. 거짓의 사회는 그 내부로부터 악이 생겨나고, 그 악의 어둠으로 인해 점차 거짓이 진실이 되어 가는 사회입니다. 왜 이렇게 가짜 뉴스가 많고 가짜 뉴스를 진짜 뉴스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을까요?

8) 온유: 진복팔단에서 가난과 온유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 가난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온유할 줄 압니다. 온유의 다른 말은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이며 이는 가정과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특성이라고 봅니다. 잘못을 말하면서도 잘못한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포용하는 넉넉함을 의미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죄는 미워해도 죄인을 미워하지 않는 너그러움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 자기 자리를 찾은 사람은 타인에게 부드럽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며 겸손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저는 부드러움이 많이 부족합니다. 이는 사람 중심적인 사람이기보다 일 중심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9) 절제; 타인의 품위나 이익에 해를 끼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려는 태도이며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지배 욕구를 통해 타인을 이용하고 조종하려는 쾌락과 편리함을 자제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사실 모든 면에서 절제가 필요합니다. 수많은 욕구의 절제에서부터 시간과 공간의 절제 등 우리의 일상에서 꼭 필요한 특성입니다. 요즘과 같은 코로나 펜데믹 시기에 가장 필요한 자질이자 미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종내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몸과 마음, 이상과 현실 속에서 조화롭고 균형잡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성령의 열매 9가지 중에서 하나둘 정도 부족한 게 아니라 모두 다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오면 성령의 열매는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저를 포함해서 모든 이에게 필요한 열매는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오랫동안 수도자로 살아오면서, 참회 곧 고신 극기는 썩 잘하는 사람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수도자들 대부분 고신 극기를 잘합니다. 그런데 겸손한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겸손이야말로 모든 열매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토양입니다. 겸손은 하느님 편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것이며, 자기를 참으로 아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 수련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체험할 때 나옵니다.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변화이며, 이를 통해서 오히려 들어 높여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 (Lk14:11) 또한 야고보서 4장 6절에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신다.>고도 하셨습니다. 아주 오래 전 저의 본당 신부님이셨던, 김정용 안당 신부님은 금경축 축하 인사에서 참석한 모든 이에게 <사제는 물론 수도자는 겸손해야 합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신부님의 지난 50년의 사제생활은 겸손과는 거리가 참 멀었습니다. 어쩌면 신부님은 자신의 지난 사제생활을 되돌아보면서 뼛속 깊이 자신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깨달았기에, 후배들에게 진지하고 진솔하게 당부하신 것이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참으로 신부님의 한 말씀은 반전이었고 대박이었습니다. 그분의 성격처럼 직설적이며 진솔한 자기 참회 고백이며 후학들에게 남긴 일갈一喝이었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심령으로 부활의 새 생명과 새 생활을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성령님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고 더 비워 둡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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