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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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보면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고(마르1,35/루11,1; 22,41-44), 또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고 촉구하신 것(마태5,44;24,20;루18,1참조)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당대의 교사들과 비교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찬양 기도를 촉구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물론 유대인 경건자들은 지상에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소임은 오직 하나, 곧 하느님의 영광을 더하는 일임을 아는 사람들이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을 끊임없이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오히려 역경과 시련에 직면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태5,44), “이런 일(재난)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시오.”(마르13,18),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시오.“(루22,40)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까닭인즉 그때야말로 우리는 자기 자녀들을 악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으신, 하늘에 계신 자비로운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해야 하는 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9.10.13) 이로써 예수님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 때문에 기도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악의 권세를 극복할 수 없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의지하고 의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결코 아무것도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8,28참조)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관해 가르치고자 한 핵심은 바로 우리가 빌 수 있고 또 빌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 성령’(루11,13)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깨닫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성령의 도움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11,2~4) 이 주님의 기도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유일한 기도이며 최종적인 기도입니다. 

오늘 루카 복음에 보면,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11,1)라고 간청합니다. 사실 ‘기도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예수님과 성령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주님의 기도 또한 부활하신 이후에 주님의 성령을 통해서 온전히 배울 수 있었으며, 이를 위해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 영혼 안에 머무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기본적인 교리는 사도 바오로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로마서 8, 26절입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법을 잘 모른다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 스스로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관계 사이에 심각한 위선에 빠질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 머튼은 ‘마음의 기도’에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초보자라는데 완전히 만족하고 그리고 자기는 별로 아는 것이 없고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이며, 벌거숭이 상태에서 배우고자 하는 절실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자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지 않고서는 기도와 묵상 생활의 참 난관에 직면할 수 없다. 사실 처음부터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절대로 무엇을 아는데 이르지 못할 것이다. 자기 수준 이상으로 기도하고 묵상하려 하고, ‘기도의 높은 단계’라고 믿어지는 것에 도달해 보려고 지나친 열을 내는 사람들은 진실과 사실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긴 세월의 겸손과 참회가 그 구제책이 될는지! 우리는 초보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 생애를 통하여 언제나 초보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기도는 결코 나의 계획이나 활동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인간의 내면의 성전에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으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성령 체험을 기록한 그리스도교적 전통적인 기도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각 수도회의 영적 전통으로부터 우리는 기도에 관해서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수도회는 기도의 학교입니다. 저희 수도회 회헌 37항에 보면, ”창립자께서는 당신의 추종자들이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열망하셨고, 우리의 공동체들이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는 합당한 장소가 되며, 참으로 기도의 학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핵심은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하는 일에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으리라 봅니다. 여러분이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권고하신 것처럼 ‘저희를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이를 힘써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헨리 나웬 신부의 다음 표현을 마음에 기억하면서 오늘을 살도록 합시다. ‘산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봉사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생활로 드러나지 않고 꽃과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을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네.“(로8,15)


    다해(2): 연중 제17주일: 루카 11, 1 - 13

저에게 신자들이 자주 묻습니다. ”신부님, 왜 기도해야 합니까?“라고.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굳이 답변하자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고, 기도하시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기도가 필요 없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홀로 외딴 곳에서 기도하셨고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낮 동안 당신을 필요로 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면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기도하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는 삶을 사시고 우리 또한 그렇게 사시도록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냐면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기도하며 사랑하는 삶은 결국 하느님과 이웃과 하나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며 하나입니다. 즉 기도와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영적 호흡과도 같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의 들숨이라면,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날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들숨과 날숨이 자연스러울 때 우리는 세상에서 참으로 조화롭고 평화로우며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왜 기도해야 합니까?’라고 묻지 말고 ”지금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한다기보다, 오히려 저는 제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기에 기도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 기도는 어렵거나 힘들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의 만남이며 대화이며 사귐의 시간입니다. 기도 시간은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시간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할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보다 하느님께 대한 더 큰 사랑의 응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서보다는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할 시간을, 기회를 드리는 것이 가장 자녀다운 사랑의 태도이며 효도의 삶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도가 무엇인지 묻기보다, 이젠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먼저 묻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깨달을 때 기도는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전 생애를 통해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죽는 순간까지 당신께서 말씀하신 ”아버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신 대로 이를 실현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피와 살에 스며들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기도의 특별한 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함으로써 당신 제자들이 혼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모든 것을 돌보시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 그분은 자신들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라시는 분이심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이로써 우리가 기도할 때 ‘어린아이가 아빠를 향한 완전한 신뢰심과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 앞에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고 그러한 당신 삶을 함께 나누기 위해 당신 기도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유물론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의 딸이 어느 날 친구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무런 신앙도 없이 자랐고 하느님을 믿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낡은 책 속에서 기도문을 하나 발견하였는데 만약 그 기도에 나오는 하느님이 계신다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친구가 그 기도문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주님의 기도’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아버지의 뜻을 살려고 할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우리네 삶에 이루어지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우루과이 한 작은 성당의 벽에 이렇게 써 놓았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하지 말아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지 말아라!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일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이 기도문은 주님의 기도를 앵무새처럼 다 외운다고, 수백 번 기도한다고 하여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주님은 기도할 땐, ‘청하고 찾고 두드려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도하였음에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껴 절망 가운데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와 삶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4, 2~3) 둘째, 하느님께서 또 다른 계획을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듯싶어도, 그분은 분명 미래를 내다보시며 또 다른 계획을 갖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느님의 계획을 찾고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에게 주어서는 안 될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는 하느님께서 절대 들어주셔서는 안 될 기도가 있습니다. 그 같은 기도를 들어 주시면 미래의 우리네 삶이 더욱 불행과 곤경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기도의 가르침 뒤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1,11)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아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넷째, 우리의 기도가 항구함의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소원을 기도하면서 며칠, 혹은 몇 달을 못가 포기하면서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항변하면서 원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도시의 한 아파트에 불이 났었답니다. 자신의 어린 아들이 불과 연기에 휩싸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달려와서는 울부짖으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고, 아이는 4층에서 “연기가 너무 많아 아빠가 보이지 않아요. 살려주세요, 아빠. 무서워요, 아빠!!”라며 외치기 시작하였지요. 그러자 아빠가 아들에게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 무서워하지 말고 창문 아래로 뛰어내리거라!!” 하자, 아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아빠를 믿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림으로 생명을 구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 어린 아들이 아빠를 신뢰하고 내어 맡긴 것처럼 우리 역시도 우리를 이렇게 사랑으로 지켜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내어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에 우리를 동참시켜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참여하여 아버지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성령을 통해서 성령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만들 것이고, 그런 기도는 오로지 기도함으로써만이 배울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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