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나약함은 아름답습니다.] - 예수 고난회 김영익 루도비꼬 수사신부
최근에 홍상수감독님이 “지금은 맞고 과거는 틀렸다.”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현재시점에서 지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늘 아쉬움과 부족함이 발견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누구나 나름 자신이 선택이 순간순간 옳다고 믿고 행동합니다. 곧, 아무도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 그 길을 그냥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 영화제목을 ‘과거도 맞고 현재도 맞다.’로 바꾸고 싶습니다.
인생에 대한 저의 제한된 경험과 주관된 이해 안에서 볼 때 삶이란 옳고 그름의 시비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이란 살다보니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경험하다 보니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그 길을 가다 보니 조금씩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과정 같습니다. 그리고 그 길과 경험 그리고 깨달음은 각기 다른 인생의 계단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고유한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만일 지금 복음의 상황에 처한 사도들이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과 반응을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형제들의 대답은 어떨지 모르지만 제가 지닌 삶에 대한 이해의 정도와 깊이 정도에 맞게 어느 순간은 유다나 베드로 아니면 수군대는 나머지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의 모습을 보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현실이라는 삶의 굴레를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고 예수님 시대에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했던 제자들에게 있어서 스승 예수가 보여주는 미래는 당연히 절망적인 것과 무기력한 것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반응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처럼 허점투성인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평생 부족한 모습을 죽는 순간까지 인간조건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 인간입니다.
이 인간다움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계속 인간이기 위해서 부족함을 지녀야 하고, 하느님이 완전하신 분으로 우리 인간과는 다른 분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라도 우리는 평생 나약함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과 나약함이 없다면 주님과 우리와의 구분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우리를 위한 그분의 구원사업도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곧,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해 더욱 주님의 구원사업이 빛나고, 우리가 그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약함이라는 인간조건은 때로는 삶의 문제를 일으키고 불편함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것 만 아니라 나약함이 지닌 긍정적인 의미와 가치 또한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약함과 실패를 통해서 깨우침과 성장을 얻습니다.
우리는 나약함으로 인해 아직도 살아야 할 삶의 이유와 몫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나약함이 없다면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주는 삶의 깊이와 감추어진 맛도 모를 것입니다.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해 우리가 함께 모여 살고 함께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약함이란 인간조건은 우리에게 절망보다는 희망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 한 때 저는 수도생활 안에서 완전함을 추구한 적 있습니다. 그 때 제가 생각했던 완전함은 흠도 결핍도 전혀 없는 완벽함이란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과 형제의 부족함 앞에서 너그러움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결점이 없고, 보다 더 뛰어나고, 보다 더 무언가를 잘 해 내는 사람이어야 될 것 같았고, 나의 나약함을 형제들에게 보여주기를 주저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더 흘러서 제가 평생 부족한 인간으로 살아야 함을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저 자신과 형제를 바라보는 동안 큰 안정감과 평화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함은 흠과 결점이 없는 완벽함이 아니라 비록 나약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사랑하려는 태도와 노력이라는 것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문제를 지니고 있지만 문제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도 사랑하고 베드로도 사랑하고 나약함이 노출되지 않은 다른 제자들도 사랑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숨겨진 나 자신이고 그들의 사랑하는 것이 곧 저를 사랑하는 것임을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남은 수도생활이 사랑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자비 안에서 비록 제 자신이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 전보다 더 인간다울 수 있어서 좋고, 부족함이 있더라도 삶이 자유롭고 넉넉해질 수 있음을 배워가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2년 전에 성탄파티에서 선물을 나누며 형제들 앞에서 읽었던 시 한편을 다시 읽고 강론을 마치고 싶습니다. 시의 제목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이고 정용철 시인의 시입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닙니다.
그대의 초라함 그 부끄러운 눈빛이 있기에 나는 그대의 가슴에 스며들어 그대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온전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대의 부족함 그 안타까움이 있기에 나는 그대의 가슴에 스며들어 그대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화려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대의 그늘 그 아픔이 있기에 나는 그대의 가슴에 스며들어 그대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당당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대의 망설임 그 갈등이 있기에 나는 그대의 가슴에 스며들어 그대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부요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대의 가난 그 한숨이 있기에 나는 그대의 가슴에 스며들어 그대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말 때문이 아닙니다.
그대의 침묵 그 눈물이 있기에 나는 그대의 가슴에 스며들어 그대의 사랑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