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세계에 근접해 살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햄버거나 샌드위치의 원조 격인 주머니 빵에 여러 가지 속을 넣어 먹는 재미다. 하나의 이야기 가운데 다른 이야기를 넣어 서로의 의미를 보완 강조하는 마르코의 문학적 기법은 엄밀히 말하자면 샌드위치식이 아니라 주머니 빵식이라 함이 더 적절하다.
대표적인 것이 야이로 회당장 딸 치유이야기에 하혈하는 부인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여인에게 하는 예수님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와 야이로 회당장에게 하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는 말씀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일깨운다. 또 다른 예로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성전정화 사건을 끼어 넣어, 열매는 없이 외양만 화려한 종교가 어떻게 저주 받을 것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 읽은 세자요한의 순교이야기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고, 그들이 돌아와 자신들이 거둔 성과를 보고하는 이야기 사이에 끼어있다. 제자들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그 사이에 낀 세자요한의 수난 이야기가 뜻하는 바는 다소 복잡하다.
엑서더스(탈출기) 는 하느님의 꿈을 같이 꾸며 그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 꿈이 현실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갈등과 투쟁을 그린 원형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당시 이집트 사회의 구성을 보면 대략 전체인구의 1~2% 의 지배자들(로얄 패밀리, 그 친척 떨거지들, 고위 공직자, 장군, 고위 성직자들) 이 사회총생산의 삼분의 일을 소비했다고 한다. 인구의 90%에 이르는 농부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부의 삼분의 일로 겨우 연명을 했고…….그랬으니 노예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짐작할 만하다.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지만, 요컨대 역사는 공동선을 추구하여 같이 살자는 세력과 개인의 영달과 일족의 부귀영화가 우선인 세력 간의 알력과 다툼이라 할 수도 있겠다.
물론 현실의 지배자들도 겉으로는 공동선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지난번 NLL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듯, 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는 서슴지 않고 국익이든 공동선이든 무엇이나 내 팽개치는 자들이다. 마르코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세자요한을 헤로데와 대척점에 있는 이들로 소개하는 격이다. 세자요한과 예수를 비롯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의 비참한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가치나 기준으로 “세상을 이겼다” 는 믿음을 견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