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에는 공동체로 묵주신공을 한다. 신공神功 이란 말은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말이지만, 내공을 쌓는다는 의미에선 기도와 선공(善功)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 가톨릭의 신공과도 상통한다. 요즈음에는 사이비 언론들의 여론조작과 왜곡을 비아냥거리는 말로 침소봉대 신공, 거두절미 신공도 있다. 매일미사 책이 널리 보급되면서 우리 가톨릭교우들 사이에서도 거두절미신공(去頭截尾神功) 이 유행하지 않나 싶다. 앞 뒤 문맥이 단절된 채 한 단락만 읽게 되니 말이다.
갈릴레아에서 활동을 시작한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는 메시지를 좀 더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제자를 모으고 그들을 파견한다. 제자들의 메시지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군중을 이루어 예수에게로 몰려들고,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이 일어난다. 빵을 배불리 먹은 그들은 경제문제, 복지를 해결할 적임자로 예수를 지목하고 왕으로 삼으려 하나 예수는 이를 거부한다. 이 맥락에서 예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고 하시며 껍데기들은 가라고 선포하신다. 사실상 국물을 원해 예수를 따라다니던 많은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떠났다고 복음서는 보도한다. 껍데기들은 가고 알맹이만 남은 것이다. 알맹이들의 마음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고 예수님은 이 바탕위에서 메시아의 수난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오늘 복음은 이런 맥락에서 양인 제자들이 목자인 예수와 어떻게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귀려면 먼저 소통이 시작 되어야 하고, 나중에는 말없이도 알아듣는 이심전심의 경지에까지 가게 된다. 우리도 하느님과 사귀어 가는 과정을 보면 처음엔 용각산 선전처럼, ‘이 소리도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등의 시행착오를 거쳐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처럼 점차 침묵을 배우게 된다. 우리들 마음이 생각이라는 소음에서 벗어나 침묵에 들게 될 때 크게 느껴지는 것은 ‘평화’ 다. 시간의 덫에서 벗어나 영원에 접속될 때 비로소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날 때 먼저 평화를 말씀하시지 않던가? 그리고는 성령을 받으라고 숨을 내 쉬신다. 마찬가지로 평화를 맛볼 때 거의 동시적으로 우리의 숨의 질이 달라지지 않던가?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면서…….자신과 이웃과 세상과의 불화를 불식하면서! 오늘 성소주일이다. 그리스도교인의 성소는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누리고 전하는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했다. 시편 34:9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