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엠마오 이야기를 두고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너무 진실하다” 고 했다지. 나름대로 나는 엠마오 이야기를 “마음을 나눈 뒤에 비로소 가진 것을 나누게 되고, 바로 그때 하느님은 거기에 현존하신다.” 로 읽는다.
제자들은 길을 가며 저희들끼리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다가, 합류하게 된 낯선 사람에게 글레오파는 좀처럼 드러내기 어려운 속내를 드러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은 요즈음에 일어난 일들을 전혀 새로운 빛으로 재해석하게 되고, 낯선 사람은 예수가 된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속에 든 것을 의미 있게 나누려 한다면 먼저 자기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하고,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관건이다. “구원은 기억에 있다” 는 말이 아무런 팔자타령이나 넋두리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페샤 거틀러의 다음 시는 고통스럽고 무의미하던 기억이 어떻게 거듭나는지를 보여준다. 돌아보면 기억의 이런 재해석은 20대에, 중년의 위기때, 또 지금 같은 삶의 전환기마다 다시금 해야 한다.
The Healing Time Pesha Gertler
Finally on my way to yes
I bump into
all the places
where I said no
to my life
all the untended wounds
the red and purple scars
those hieroglyphs of pain
carved into my skin, my bones,
those coded messages
that send me down
the wrong street
again and again
where I find them
the old wounds
the old misdirections
and I lift them
one by one
close to my heart
and I say holy
holy.
마침내 삶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나는 ‘No’라 하며 거부하던 온갖 곳에 부딪히며 살아왔구나
방치된 울긋불긋한 상처와 흉터, 상형문자로 피부와 뼈에까지 새겨져 암호화된 고통의 메시지는 거듭 거듭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그 뒷골목에서 오래된 상처, 오랜 방황을 되돌아보며 하나하나 들어 가슴에 대며 속삭인다 거룩, 거룩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