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이 현주 목사가 까리따스를 통해 펴낸 “예수를 만난 사람들” 이란 책이 있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자캐오도 분명 이름을 올렸을 것 같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라는 말처럼, 예수를 만난 사람은 많지만 진정 만난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자캐오는 어떻게 예수의 진면목을 끌어낼 수 있었을까?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유다에서 자캐오는 세관장으로 유족한 생활을 했지만 그다지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 같다. 말하자면 외세에 편승한 부역자로서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와 손가락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자캐오라고 그럴만한 사연이 왜 없었겠는가! 근본 없이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태생적 신분의 제약이나 계층의 한계등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연이 있었을법하다. 하지만 어디 위선적인 사회가 그런 하소연을 받아주는곳이던가?
그것을 잘 알기에 그 모든 사연을 가슴에 묻고 별 의미 없이 연명하던 그에게 예수라는 인물은 커다란 호기심과 기대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세관장이란 어른이 체면 불구하고 나무위로 올라갔으니 말이다. 그러므로서 자캐오는 예수를 볼 수 있었고, 동시에 자신을 예수께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군중 속에 숨어서 예수를 봤다면 아마 만나지 못했을 예수의 진면목을 이끌어낸 신의 한 수는 바로 일대 일의 대면이었던 듯.
하느님의 현현사화는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는 욥기 38장을 떠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