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일 년이 넘게 코로나 19로 곤욕을 치르다보니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없이 지내던 일상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것을 누릴 때는 남루하기조차 하던 일상인데, 이젠 마스크 없이는 집밖에 나갈 수 도 없으니 생각 없이 한 껏 심호흡을 하던 때를 그리워하는것도 당연하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는 나름대로 일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닭을 쫒고 사람들은 나를 쫒지. 닭들은 모두 비슷비슷하고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나는 늘 지루해.” 우리는 지금 이런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셈이다.
오늘 주님 세례축일의 제 2 독서에서 베드르는 수제자답게 예수님의 치적(治績)을 이렇게 간단하고도 깔끔하게 정리한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처음 대학 강단에 설 때는 아는 것은 물론 모르는 것 까지 가르치려고 열과 성을 다한다. 그러다 조금 세월이 흐르면 아는 것만 가르치게 되고 좀 더 연륜(年輪)이 쌓이면 필요한 것만 가르치며, 종국(終局)에는 기억나는 것만 가르친다고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소개하는 말은 산전수전을 다 거치고 원숙(圓熟)해진 마지막 단계인 것 같다.
종교가 “성수를 곁들인 사회사업 차원에 머물지 않으려면,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할뿐만 아니라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고쳐주어야 한다.” 좋은 일은 자선사업가나 NGO등 시민단체 또는 정부의 복지정책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일은 영(靈)에 관계된 것으로 세상의 논리나 문법과는 다른 훈련을 요한다.
다시 코로나 사태로 시선을 돌려보자. 2020년을 통틀어 이보다 더 극명한 시대의 징표는 없을 것이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방역당국이 국민들에게 부탁하는 방역수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방역수칙은 크게 마스크 착용과 손씻기등 개인책임을 기본으로 이제까지의 생활양식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불필요하게 무리지어 왁자지껄하게 싸돌아다니던 생활을 지양(止揚)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하여 이제껏 맺어왔던 인간관계도 단순하게 정리하라 권고한다. 다시 말해 코로나 사태는 이제껏 논리적, 계산적영역인 AI 적 차원의 가치추구에 몰두하던 삶의 양식을 벗어나 Nous를 개발하는 관상적, 영적인 차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다는 경고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