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무일도의 시편 8편이 아득한 옛일을 기억나게 하다. 청주에서 지원자 시절을 보내던 시절, 밤하늘 가득히 빛나던 별과 은하수를 바라다보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스쳤다. “하늘의 별과 은하수를 만들 정도로 큰 창조주가 왜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셨을까?” 물론 판에 박힌 답은 사랑이었지만 내 마음은 그런 구태의연함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느꼈던 경이로움을 당시 지도자였던 박도세 신부님과 나눌 수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박 신부님은 그런 경이로움을 당신체험으로도 아셨기에 우리는 공감할 수 있었다. 그 때 나와 박신부님과 시편 8편 저자의 마음자리는 같았을 것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그리고 몇 달후 베드로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묘지에는 새로운 봉분이 하나 더 생겨났다. 그날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새로 만든 봉분의 상태를 점검해 보려고 묘지로 올라갔는데, 마리아 할머니가 우산을 받쳐 들고 울고 계셨다. 왜 이곳에 서 계시냐고 추운데 들어가시라 했더니, 베드로가 비를 맞아 추울 것 같아 우산을 들고 이렇게 받쳐주고 있노라 하셨다. 아마 이런 체험이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건지 어렴풋이 알게 해주는 것 같다. 일견 무모한 일인 듯 하지만 뭔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느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상기해보면 마리아 할머니의 행동은 하느님이 움직이신 결과다.
“우산을 씌어주는 사람은 많을 수 있으나, 함께 비를 맞아주는 사람은 드물다.” 는 말을 곱씹어 본다. 수십 년 동안 자식 하나 없이 살아온 베드로와 마리아 할머니가 이뤄낸 관계는 차가운 봄비에 젖어 베드로가 추울까 그 빗속에 연로한 몸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눈물지며 서 있게 했다.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 막달레나의 행동을 이해할 것 같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다 함은 비를 같이 맞아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렇게 비를 맞는 하느님 옆에 다시 그 비를 같이 맞기 위해 머무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구원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