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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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행복 강의 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그들의 것이다.”와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

 

 

진복팔단은 하느님 앞에 사셨던 예수님의 태도이며, 하느님 앞에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8가지 존재의 태도 곧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할 모습, 살아야 할 모습입니다. 각각의 복은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보충하면서 통합되신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복 8단의 각각의 복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느님 앞에 흠 없이 설 수 있어야 하고 마침내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아빠 하느님과의 그 하나됨에 우리도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지복至福(=더할 수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복음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과 평화와 기쁨, 더 나아가서 구원과 구속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곧 하느님이며, 그분의 계명과 약속은 행복에 대한 우리의 갈망 및 그 갈망을 만족시키는 길과 일치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참된 행복, 眞福은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이 사셨고 행하셨던 예수님의 삶으로 초대이며, 참된 행복을 지향하라는 권고이며 호출입니다. 참으로 인간답게 살고자 한다면 진복팔단은 필요불가결한 통과의례이며, 그런 점에서 진복팔단은 어떻게 해야 인간답게 살고, 고통당하고, 수고하고, 투쟁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4행복과 4불행을 선포하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6,20,24)고 말합니다. 이처럼 루카(=행복4,불행4)와 마태오(행복8)의 차이는 구조적인 차이보다 더 깊은 차이는, 루카는 예수님과 그분 나라의 견지에서 행복한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 행복한가?’ 명백한 편애 대상과 선택 대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마태오는 행복하게 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할 것인가?’ 루카는 가난 그 자체를 더 강조했다면, 마태오는 마음(=내적 가난은 가치요 덕이다.)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지니고 살아야 할 복음적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루카의 참된 행복은 그리스도교적 복음화의 선택과 방향을, 마태오는 그리스도교적 복음 선포자의 영성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이로써 마태오는 루카의 관점을 보완해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마태오 복음의 처음 두 가지 참된 행복, ‘마음이 가난한 사람’(=가난한 사람의 정신을 지닌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이를 의미한다.)과 ‘온유한 사람’에 관한 행복은 동일한 요구 조건(=다른 관점과 시선; Anawim)과 절박성을 지닌 만큼 함께 살펴보렵니다.

 

마음의 가난, 내적 가난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 실존 위치를 알고,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한낱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가난 정신 Anawim-Ruah은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나는 나다!>를 알 때, 하느님 앞에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이처럼 가난한 자는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요,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 손에 온전히 내맡기는 존재입니다. 왜 이런 사람이 행복할까요?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빠 하느님 앞에 사셨고, 우리 역시도 그런 마음으로 아빠 하느님 앞에 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나윔 루아가 바로 하느님 앞에 사셨던 예수님의 존재 태도였으며, 예수님은 아버지를 그렇게 모시고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제자가 되고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가난은 참된 가치요 덕입니다.

 

마태 11, 25절은 이를 가장 극명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셨고 우리 또한 살아가기를 원하는 하느님 앞에선 우리의 존재의 태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하는 척, ~하는 체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의 태도와 상반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을 비우려는 자세, 곧 빈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알차게, 풍요롭게 살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는 서구적인 삶의 태도이지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마음으로 더 흡족해하실 겁니다.

 

불교의 반야심경에선, 텅 빈 충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를 알아 모시기 위해 텅빔을 강조하셨는데, 이는 텅 빈 상태가 좋아서가 아니라 텅 빈 마음에 오직 하느님 아버지로 채우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앞에 무언가가 남아 있을 때 장애물, 걸림돌이 됩니다. 하느님 앞에 무언가가 하고 싶고, 얻고 싶고, 받고 싶은 것이 때론 걸림돌이 되고 장애물입니다.

 

필리 2,6 케노시스, 이것이 진정한 마음의 가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 물론 예수님은 실재적으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탄생의 순간부터 30년 동안의 나자렛의 숨은 은둔 생활 기간, 특히 3년의 공생활 동안 내내 머리 둘 곳도 없으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벗김 당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물질적 가난함은 마음의 가난함에 이르는 수단이고, 우리가 주님을 본받는 일의 조건이며 그 과정입니다. 이는 곧 우리에게 마음의 가난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근본적으로 빈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원의가 있고 또 강합니다. 물질적인 것, 외적인 것에 영향을 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자유롭게 뭉쳤다가 흩어지며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처럼, 거침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어느 것에 연연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미련 두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 131에선,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제 눈은 높지 않습니다. 저는 거창한 것을 따라나서지도 주제넘게 놀라운 것을 찾아 나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주제넘게 놀라운 일 꿈꾸지 않으며, 어느 것에 신경 쓰거나 발버둥 치지 않고 가만히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머물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 앞에서 거창하고 멋들어진 생각을 하기보다 차라리 분심分心이 낫습니다. 분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좋은 생각은 때론 하느님 앞에 가난한 자가 될 수 없이 뭔가를 하고자 하는 내면의 표현이기에 자연스럽지도 않고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安貧樂道(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며 즐김)는 제 아버지께서 남긴 가훈이었습니다. 이런 안빈낙도의 마음으로 사셨던 예수님은 실제로 가난하게 사셨을뿐더러 마음의 가난을 실천하신 가난한 존재이셨으며, 이런 주님을 우리는 닮고 싶고 그분처럼 살고 싶은 게 우리의 바람입니다. 마음의 가난은 마음의 상태, 마음가짐이지 재산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의 有無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가난이란 무엇일까요? 교회사의 체험과 교훈은 애착을 두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다고 해왔습니다. 곧 <물질에 매이지 않은 사람이 자유롭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법정 스님 하면 연상되는 표현이 바로 <무소유>이잖아요. 무소유는 바로 실제로 그렇게 빈 마음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소유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을 낳고 그것에 얽매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역시 어떤 그 무엇으로 괴롭지 아니하고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소유 혹 관계에서 자유로운가? 이렇게 스스로 무소유의 가난을 선택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마음의 가난은 마음의 해방, 사람과 사물로부터의 초연함을 의미합니다. 이런 가난은 비단 돈과 물질적 재화의 결핍 또는 돈과 물질적 재화로부터 이탈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과 내적 자유를 나타내주는, 특전을 벗어던지는 이탈, 비난을 감수하는 이탈, 갖가지 형태의 권력을 외면하는 이탈, 경력을 갖고자 하는 욕구를 배제하는 이탈, 위험과 불안과 박해를 감수한 이탈로도 드러나며, 이로써 이런 삶을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겸허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하느님의 손에 맡길 겁니다.

 

마음의 가난을 실천하려는데 있어서, 하느님의 관점에서 가난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기초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적 가난은 다른 종교와 달리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동기가 다릅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 8, 9) 그리스도교적 가난은 그리스도의 가난에 참여이며, 예수님의 가난에 복음적 가난의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가난의 삶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가난의 모방이자 추종입니다. 추종의 구체적인 증거는 이탈과 포기로 드러나며, 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포기의 동기 곧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그 나라에 실제로 참여하는데 있습니다. 이 같은 마음의 가난은 필연적으로 실제적인 물질적 가난, 구체적 형태의 초연함, 가난하면서도 검소한 생활양식을 통해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가난하심은 숨으심(=30년 동안), 무력하심(=고난받으심), 자기비움(=십자가)으로 드러납니다.

 

저의 과거 경험을 되돌아보자면, 중국과 파푸아 뉴기니 여행 체험을 통해 저는 가난하지 않았고 머리로만 가난한 삶을 살아왔다고 느꼈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편안함과 깨끗함에 익숙해진 제 몸이 더러움과 불편함에 견디지 못했기에 힘들었습니다. 생각으로만 가난했지,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척산리 수련소(*현재 없어짐)에서 살면서 마음의 가난함 이전에 몸의 가난으로 살게 되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더더욱 베트남에서 생활은 몸과 마음의 가난을 살게 된 계기가 되었고, 귀국 후 수도 생활에 혼란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아니 대부분의 한국 수도 공동체는 예전과 달리 풍부해도 너무 풍부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가난의 잣대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각 나라의 상황, 각 수도회의 정신 그리고 각 개인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다만 저는 벳남에서 되돌아와서 부족함이 없는 생활로 인해 처음엔 마음으로 불편했지만, 참으로 짧은 시간에 몸이 그것에 맛 들인 것을 느끼면서 사람의 몸은 참 간사스럽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내 그런 생각도 다 사라져버리고 풍부함에 익숙해져 있는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또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과 달리 편안해지려는 요구에 타협하고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풍요로운 세상에서 몸과 정신 그리고 마음으로 가난하게 산다는 게 참 어렵습니다.

 

<온유(온하고 부드럽다)한 사람은 행복하다.>

(*최민순신부 번역: 온순(온화하고 단순하다)한 이들이 행복하다.)

 

시편 37장을 잠시 읽고 난 다음에 두 번째 진복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근본 자세가 머리와 고개를 숙이는 마음의 가난, 곧 겸손한 마음이라면, 형제들 앞에서 태도가 바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온유함을 실천한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약속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5,5) 시편에서 <착하게 사는 자는 땅을 차지하여 언제까지나 그 위에 살리라.>(시37,29),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큰 평화로 즐거움을 누리리라.>(시37,11) 반복해서 표현된 <땅을 차지할 것이다.>는 표현에서 언급한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탈3,17) 곳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후손에게 (창12,7) 약속된 땅이지만, 주님의 어지심을 관상할 수 있게 되는, 그리고 영성적으로는 <새 땅>(이65,17)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땅은 바로 주님의 영광이 깃드는(시 85,9)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뜻은 <하느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기에 <복지에 머물러라.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축복을 받으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Q 문헌의 해설은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에게 부드럽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성 아오스딩은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께 내적으로 친밀하게 결합하는 것이고, 온유하신 너의 하느님께 저항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시편 37,34~40에 잘 드러납니다. 선인과 악인의 비교에서, <악한 자가 잘되고 불의한 자가 잘 산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고 꿋꿋이 살아라. 즐거움을 찾고 하느님을 믿어라. 부당함으로 힘들고 어렵더라도 버티고 항의하고 불평 중에서도 두고 보고 하느님을 믿고 기다려라. 하느님께서 착한 사람을 돌보신다.>고 위로하고 독려督勵해 줍니다.

 

예수님의 이미지 내지 초상肖像을 그리자면 <온유함>일 겁니다. 그 까닭은 마음의 가난과 함께 온유함은 그분의 유일무이한 표본이시고 영성의 본질적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12,9~20절에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셨으며, 이를 통해 그분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온유한 분>(12,20)으로 드러나십니다. 예수님은 낮은 사람, 병든 사람, 죄인들 모두를 기꺼이 맞아들이시고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고 심판하길 바라셨을 때,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8,10~11참조)라고 말씀하심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3,17)라는 당신 말씀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는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즉 참으로 온유하신 분이심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마태오 23,4의 말씀에서,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들의 온유하지 못한 마음가짐과 그릇된 행동을 질책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셨기에 우리에게 온유함을 살도록 권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온유한 사람들을 축복하실 때 사용한 단어 mitis는 이전에는 욕심 많고 거칠며 엄격했던 것이 관대寬大(=마음이 넓고 남을 헤아리는 아량이 있음)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형제들에게 ‘까다롭지 않고, 따지지 않으며, 이해할 줄’ 압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갈라디아 6,1에 잘 드러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이는 무조건 잘못이나 죄를 덮어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잘못을 바로 교정해 주어야 합니다. 결국 마음의 가난, 겸손한 자세가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고 온유한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은 온유함 그 자체이시고, 예수님의 온유는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고 <‘네’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잘못된 점은 지적하시면서도 상대방을 용서하신 분이십니다. 인자하신 분, 사정을 이해해 주시는 분, 관대하신 분이십니다.

 

복음에서 온유한 사람들을 축복할 때처럼, 온유는 음식이 농익어 부드러워진 상태, 술의 경우는 텁텁하던 맛이 숙성되어 달면서 스무드smooth한 상태를 말합니다. 토양의 경우엔 척박한 밭을 잘 일구어서 부드러워진 상태, 동물은 잘 길들어져 온순해진 상태, 사람은 관대하고 유순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유순하게 길들어진 상태는 반복된 습관을 통해 마침내 유순하게 되고 길들어집니다. 그래서 천성적으로 거친 것은 보다 덜 거칠게 되고, 어려운 일이라도 더 잘 참게 됩니다.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 <나이가 너를 누그러뜨릴 것이다.>라고 할 때의 관대함을 의미합니다. 노사연의 바램에서 노래한 것처럼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견딜만한 어떤 것, 부드럽고 너그러운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엄격함 혹은 거칠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에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예전과 달리 분명 저는 타인에게 관대해졌습니다. 살이 쪄서 그런지 모르지만, 얼굴 인상도 예전과 달리 부드러워진 듯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저뿐만 아니라 모든 나이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 온 삶을 하느님 앞에 서서 그분의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 호르몬의 작용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분명 저는 사도직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과는 부드러워졌지만, 아직도 공동체 형제들에 대해서 그렇지 않은 것은, 아마도 가족이기에, 형제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세세하게 한 치의 오차 없이 명명백백하게 파헤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을 너그럽고 관대하게 바라보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늘 어제의 실패를 용납하지 못해서 자책하고 자학하던 경향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허용하시고 용서하시며 너그럽고 온유하게 대하심을 좀 더 깊게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자주 느끼면서 저 역시도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그럽고 부드러워지고 있으며, 다른 이를 더 관대하게 대하게 됩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노년에 다른 이를,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정말로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온유하고 관대해진 마음은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은 소화가 되었고, 공격적인 기질은 온순하게 되었으며, 긴장된 정신은 가라앉게 되었고, 준엄한 판단은 너그러워진 것과 같습니다. 온유함은 그런 점에서 나태, 우유부단, 두려움의 결과가 아니라 마음의 자제력으로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죄는 죄로 보면서도 죄인을 이해하고 보호해 주려는 자세와 태도 곧 받아주시는 마음. 이것이 곧 축복입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해서는 아니 된다.> <행위는 탓하면서도 존재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영적 아들인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당부합니다. <주님의 종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잘 가르치며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자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시어 진리를 깨닫게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2티2,24~26) 또 티토에게도 <남을 중상하지 말고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아주 온유하게 대하게 하십시오.>(3,2) 온유는 그러기에 사람이 살아가는 가정- 공동체 -교회의 복이고 우리는 이 복을 실행하기 위해서 이 가정-공동체-교회를 선택하였습니다. 세상은 투쟁하고 도전하고 살고 있지만 온유하고 관대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가정-공동체-교회입니다. 온유함은 지적할 것은 지적하고, 말할 것은 말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를 덮어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뛰어넘는 온유함은 사랑의 꽃으로서, 존재하는 덕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강조합니다.

 

그러나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마음의 가난, 온유한 마음이 부족하기에 공동체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 온유한 마음이 있을 때 공동체의 문제는 풀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 공동체 안에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우리의 가난 하지 않는 마음 때문입니다. 가난한 마음이 선행될 때 인간관계의 갈등과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너희의 것이고,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아멘>

 

 

** J.B. 필립스는 현실에 적용되는 진복팔단을 이렇게 잠언에 빗대어 표현하였습니다.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되는 곳인 이 세상에 빗대어서...

 

<밀어붙이는 자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얻을 것이다. / 무정한 자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인생에서 절대로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 불평하는 자들은 행복하다. 결국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갈 것이다. / 환락에 밝은 자들은 행복하다. 자기의 죄를 절대로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자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결과를 얻을 것이다. / 세상에 지식이 있는 자들은 행복하다. 자기가 가는 길을 잘 알 것이다. /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행복하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이다.>

 

** Monika Hellwig는 <가난의 유익들>이란 목록을 만들었다. 1. 가난한 자들은 자신에게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2. 가난한 자들은 자기가 하느님과 능력 있는 자들에게도 기대야 하지만, 또한 서로가 기대고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3. 가난한 자들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신의 안전을 맡긴다. 4. 가난한 자들은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과장하지도 않고 자신의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도 유난 떨지 않는다. 5. 가난한 자들은 경쟁보다 협력을 통해 많은 것을 이루어낸다. 6. 가난한 자들은 필요한 것과 사치를 구분할 줄 안다. 7. 가난한 자들은 기다릴 줄 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처지임을 알기에 자연스럽게 끈질긴 인내심을 배웠다. 8. 가난한 자들의 두려움은 좀 더 현실적이고 과장이 적다. 왜냐하면 그들은 엄청난 고통과 결핍을 이미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9. 가난한 자들이 복음의 소식을 들으면, 그들은 위협이나 꾸지람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소식을 듣는다. 10. 가난한 자들은 복음의 부르심에 확실히 포기하고 단순하게 자신의 전부를 던져 헌신할 수 있다. 잃은 것은 별로 없고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Good News to the Poor. Do they understand it better?)

 

결국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입장 자체가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에 적합한 것은 이미 결핍되어 있으며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불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은 그야말로 대환영이다.

 

참고로 이 목록에서 <가난한> 대신에 <부자>라는 단어를 넣어 각 문장을 반대로 바꿔 보면 자신의 처지를 반성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부자들은 자신에게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루카 복음의 행복과 불행 선언과 다른 면을 느낄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가난한 자들> 대신에 이번에는 <나>를 대입시켜 보라!!!! 무엇을 깨달았는가? 자신의 절박함을 인정할 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다.> 대신에 <마음이 절박한 자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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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루카 2, 16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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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루카 2, 41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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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요한 1, 1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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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루카 2, 1 - 14

    Date2021.12.24 By이보나 Views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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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대림 제4주일: 루카 1, 39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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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대림절 특강 3: 경배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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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대림 제3주일: 루카 3, 10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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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대림절 특강 2: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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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루카 1, 26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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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대림 제2주일: 루카 3, 1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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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대림절 특강 1: 대림절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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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대림 제1주일: 루카 21, 25~28, 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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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대림 시기: 기쁨과 희망 속에 구세주 오심을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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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요한 18, 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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