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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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마5,4)이란 세 번째 행복에서 <슬퍼하다.>는 것은 가벼운, 섭섭한 상태라기보다 아주 강한 느낌으로 <통곡하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유대인들이 느꼈을 그런 슬픔이며, 가장 친한 가족이나 사람을 잃었을 때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와 같은 고통을 겪었을 때 느끼는 깊고 묵직한 슬픔입니다. 5.18이나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느꼈을 느낌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표현은 결국 통곡할 정도로 몹시 억눌린 사람이 행복하다는 위로의 선언입니다. <마음이 몹시 괴로운 이들은 영원한 하느님의 위로를 받으리라.>

 

이렇게 큰 슬픔을 겪는 사람에게 주님의 위로(=남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달래 주려고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베풂)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위로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위로의 정도가 아니라 루카 2,25절에 언급된 영원한 위로, 영원한 복을 의미합니다. 경건한 시메온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현에 드러나듯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모든 어려움을 풀어주실 때를 시메온은 끈질기게 기다렸던 것입니다. 시메온이 기다린 위로는 단지 시메온 한 사람에게 주어진 위로가 아니라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위로입니다. 위로받는 때는 하느님의 개입, 구원이 시작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또한 2코1, 3~7절에서,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환난을 겪을 때 하느님의 위로를 받게 되고, 그 위로를 바탕으로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위로를 통해 참된 연대와 공감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볼테르는 ‘눈물은 고통의 말 없는 언어’이고, 때로는 흐느낌과 탄식까지 동반한다고 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에선 눈물은 고통과 근심의 표현인 것처럼, 기쁨의 외적 표현으로 웃음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루카 6,21.26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이처럼 눈물을 유발誘發시키는 것은 고통이며, 마음의 깊은 고통은 눈물을 쏟게 합니다. 사실 우리는 슬프고 어려운 일을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며 그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 즉 남의 슬픔을 자기 것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 남의 고통을 멀리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의미이기에 슬픔의 다른 단계로 우리를 호출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루카 4, 16~19 예수의 나자렛 회당의 첫 설교에서 이사야 61, 1~4의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겠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당신 사명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자기화하셨습니다. 이 선언으로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슬픔과 아픔으로 받아들이시겠다고 선언하시며 위로를 주십니다. “실망하지 마라. 내가 이해한다. 나는 너희의 슬픔을 알고 위로하러 왔다.“ 마태오 11, 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이 구절이 바로 위로자 예수님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웃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셨다는 표현은 여러 번 나옵니다. 이 또한 예수님은 남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여기시고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라자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우셨으며(요한11, 35), 예루살렘을 보시고서도 눈물 흘리셨습니다.(마태 23, 37)

 

예수님의 심정과 마음은 세상의 죄악과 고통, 죽음을 당신의 것으로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인간이 겪고 있는 어둡고 어려운 힘든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함께 겪으시고 눈물을 흘리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세상은 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셨지만, 이것이 바로 당대의 현실이었기에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38장에서, <곤경 속을 걷는다.>는 표현과 눈물의 골짜기(시23,4)라는 표현은 어둠의 골짜기나 슬픔의 골짜기라는 표현의 다른 표현입니다. 나는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기도하는 가운데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는가? 아니면 모른 척 지나치며 무관심하는가? 로마 12, 15의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우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십시오.>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 나의 성소인가? 콜로사이 1, 24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려는 게> 내 성소인가? 同情心(=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아주고 제 일처럼 여겨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답게 여기는 것, 이런 마음은 바로 사랑이 있을 때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좋지 않은 눈물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곧 <눈으로만> 우는 눈물, <악어의 눈물>을 예수님은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대 사이에 숨어 있는 악어는 인간의 울음과 비명을 따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으로만 우는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좋지 않은 눈물 즉, 원한, 분노, 미움, 복수하려는 마음에서 흘린 눈물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눈물은 상처받은 오만, 시기심에 찬 탐욕, 실패한 야망, 해결하지 못한 악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눈물은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냉혹하게 합니다. 성서의 다른 눈물 특히 신뢰도, 뉘우침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절망의 눈물은 가장 나쁜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하게 되는 거기>(마태13,12) 즉 지옥에서 쏟게 될 때, 흘리는 때늦은 후회의 눈물입니다. 아마도 유다의 눈물이 그런 눈물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때늦은 후회의 눈물!! 이런 측면에서 사도 야고보는 <죄인들이여,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4,9)라고 충고합니다.

 

이와 반대로 예쁜 눈물도 있으며 이런 눈물은 고통을 진정시키고 완화하기도 합니다. 특히 예쁜 눈물은 기도와 간구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그 예가 바로 마르꼬 9, 24 간질환자의 아버지가 <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적으면 도와 주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간구합니다. (참고: 유딧13, 7/ 토비트 12,12,/ 2마카 11,6) 예수님 또한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식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5,7) 행복한 눈물은 매우 솔직하고 위로받을 가치가 있으며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이제 다시 볼 수 없을 때는 이별을 수반하는 눈물을 쏟게 됩니다. 창 37, 34~35 요셉이 죽은 것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야곱/ 2사무 3, 32~34 다윗의 아브네르의 무덤 앞에서 통곡/ 예레 31,15 라헬의 통곡 등.

 

슬퍼하는 사람은 그들의 눈물에서 이미 위로를 받습니다. 이 눈물은 실제로 억눌린 느낌, 죄책감과 후회의 감정의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긴장을 풀어주며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켜 줍니다. 고백록에 보면 성 아오스딩은 어머니 모니카의 장례 때의 눈물을 흘린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 앞에서 어머니를 두고 어머니를 위하여, 또 나를 두고 나를 위하여 울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태껏 억누르고 있던 눈물을 마음껏 흘려 내 마음을 덮게 한 후에야 나는 후련해졌습니다.>(고백록 9권12장) 저 또한 성 아오스딩처럼 제 어머니 장례 미사 전에도 그리고 미사 중에 주책없이 울었습니다. 누이 죽었을 때처럼 엄마 돌아가신 다음 몇 달을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그런데 누이와 엄마를 잃고 난 뒤 흘린 눈물은 분명 차이가 있었습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나인의 과부(루7,13)를 위로하신 예수님은 슬퍼하는 과부와 그녀의 슬픔을 자기화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온 몸과 온 마음으로 그녀를 위로하시면서, 주님은 그녀의 눈물을 기쁨으로 바꿔주십니다. 이사야 25,8 <눈물을 닦아 주시고..>, 묵시록 7,17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신다.>, 묵시록 21,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눈물은 시간이 지난 다음 기쁨으로 바꾸어질 겁니다. 하지만 그 시간까지 누군가 함께 있어 줄 때 그 시간이 단축될 수 있습니다. 함께 해주는 그 사람 자체가 위로이며 위로의 표지입니다.

 

그런데 요즘 느끼는 것은 나이 들면 눈물이 많아지나 봅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도 눈물 흘릴 때가 많은데 대개는 살며시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입니다. 이는 호르몬으로 인한 영향도 있겠지만, 언제나 강한 척하며 살아왔던 태도에서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흔히 알콜 중독자가 상대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이 많은 까닭을 어떤 사람은 남자가 울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울 수 있다는 게 은총입니다.

 

성모님은 성금요일, <아주 고통스러워 우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날 아침부터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Regina caeli. 예전에 여러 곳의 성모상에서 눈물 흘린다는 소식을 자주 들었습니다. 왜 성모님은 눈물을 흘리실까요? 그 까닭을 알 수 없기에, 성모님께 <눈물의 골짜기>에서 흐느끼며 울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사고 간구할 뿐입니다. 물론 세상이란 골짜기에도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 안에는 삶의 고뇌와 고통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나도 태어나서는... 모든 갓난아기와 마찬가지로 울음으로 첫소리를 내었다.>(지혜7,3) 성 아오스딩이 성녀 모니카의 아들이었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토록 많은 눈물의 아들들입니다. 성모님께 위로와 기쁨을 드려야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가난하고, 빈 마음의 소유자는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을 자기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남의 어려움을 자기 것으로 만들다 보면 정이 통하게 됩니다.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자비慈悲란 하느님 속성의 특징으로서 하느님만이 자비로우신 분이시며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자비를 받고, 하느님의 자비를 바탕으로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 뿐입니다. 복음은 예수의 여러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당신 자신의 현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가르치고, ‘함께 계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통해 삶의 희망과 긍정’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게 된 이유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인간과 함께 계시면서, 인간을 향해 당신의 다함 없는 마음으로 보살펴 주시고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루가 5,1~11참조) 이런 점에서 참된 행복들 가운데 근본이 되는 복이 바로 자비의 참된 행복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 거울과도 같습니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시려고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의 강생은 자비의 시작이며, 이 자비는 십자가상의 봉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의 삶은 자비의 사도직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혹은 혼란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은 당신이 우리와 함께함을 통해서 인간의 문제, 번뇌와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하여 우리네 삶의 자리에, 서리에 함께 계시려고 들어오셨습니다. (compassion--cum + pati =with to suffer; 慈悲;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함: 同體大悲와 大慈大悲- 이런 단어는 불교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을 저는 메쥬고리아에서 만났고 그때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이처럼 자비는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새로운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셨으며, 죄악에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곧 자비는 인간 구원, 구속을 위한 구체적인 하느님 사랑의 행동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비는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심이 아니라 사람들과 결속이며 결합이고 가장 효과적인 투신이며 연대입니다. 이를 실천하고 실현하는 두 가지 현실은, 첫째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서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10,37)와 둘째 최후 심판에서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시면서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25,34)는 말씀 안에 내포된 실천과 초대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드러난 자비의 가장 뚜렷한 모습은 용서입니다. 성서에서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와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 등은 하느님은 자비이시고, 이 자비를 통해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표징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주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소.>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은 죄의 대가인 벌로 병고와 불행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씀이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복수법의 원리 안에 머물러 있던 당대 세상을 향해 예수는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원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15,2)하고 불평하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 앞에서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양, 잃었던 은전, 잃었던 아들을 되찾으심(루15, 3-32), 그리고 용서받은 죄 많은 여인(루 7, 36-50),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 8, 1-11)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과 다른 시선 곧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이심을 예수님은 명백하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아빠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시편 136의 반복되는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는 반복은 다음 말씀과 대비됩니다. 탈출기 20, 5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신명기 5,9~10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대 사대 자손들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시편 103, 111, 116, 145

 

베드로의 장모 치유 이야기(마태 8,14-17)를 통해 복음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고 한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새로운 안목을 활짝 열어줍니다. 유대 사회의 원리는 인과응보의 하느님을 생각하였습니다. 당대 사람들은 병들거나 마귀 들린 것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병고 내지 여러 환난은 그 사람의 죄로 인한 징벌이나 심판이 아니라는 선언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치유 기적은 자비와 용서의 사도직이라는 증표입니다.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실현이며, 하느님 나라가 도래되었다는 증표입니다.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우리 안에 실현된 하느님 나라와 아버지께 시선을 돌리도록 흔들어 깨움입니다. “道力을 통해 道心을 일깨우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처다본다. 견지망월見指忘月‘에 상태에 있었기에 예수님의 깊은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 주신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기적만 보지 기적이 무엇을 가르키는 지를 보지 못했죠. 치유 이야기는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시고, 사랑으로 함께 하신다는 자비의 행위입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여타의 치유자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운명을, 멍에를 함께 짊어지시려 세상의 고통 속에 뛰어드셨습니다. 이를 통해 삶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고,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때론 이해하거나 수용할 수 없는 말보다, 다만 침묵 가운데 함께함이 필요할 때가 있으며, 함께함이 곧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비전, 통찰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자비‘입니다.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다인의 삶의 중심이나 무게의 축은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바로 ‘거룩함’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시냐 거룩하시냐’ (淨 깨끗함과 不淨 깨끗하지 못함)는 논쟁이 아니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냐는 관점은 우리가 하느님에 관한 이미지에 따라 신앙인과 공동체의 생활 태도와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비판적회의적분리와 분열차별과 적대 곧 자기 보존이 최우선이지만자비함은 긍정적낙관적일치와 친교존경과 환대 곧 타인 지지와 나눔입니다성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갈등과 대치는, 바로 바리사이들의 삶과 신앙의 중심과 무게가 ‘거룩함’에만 취중하였으며, 거룩함의 관점에서 늘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차별과 적대를 통해 자기들이 믿는 가치를 보존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하느님의 자비를 상대적으로 강조하시면서, ‘하느님은 거룩하시며 자비로우신 분이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침묵의 작가 엔또 슈사꾸는 이스라엘의 황폐한 사막에서 드러난 ‘엄부嚴父’와, 인도 갠지스강의 유연한 물줄기 흐름에서 ‘자모慈母’를 대비하였는데, 산상수훈의 배경이 되는 호수와 호수를 향해 경사진 유연한 언덕의 들판과 들꽃, 이에 반해 유다 광야의 거친 사막은 대비와 함께 공존의 상징처럼 제겐 다가옵니다. 아버지이시며 어머니이신 하느님!

 

교회의 모습이 자비의 실체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 내재하시는 주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교회, 가정, 공동체 역시 자비로워야 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유럽인들은 ‘자비’를 싫어하지만, 우리는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자비’를 쉽게 이해하고 수용합니다. 불교에서 자비란 곧 해탈입니다. 경허 스님은 ‘지혜는 곧 자비이다.’고 가르치고, 스스로 그 자비를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오해를 대중으로부터 받으셨음에도 굴하지 않고 당신 방에서 나병에 걸린 여인을 돌보신 일화는 그분의 자비심을 보여 주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적인 사랑보다 더 큰 개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慈悲의 실존이며 표현인가? 자비란 관점에서 강생-수난-부활을 통해 일관되게 지속된 예수님의 존재와 삶의 모습은 한 마디로 자비의 삶과 사도직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의 가장 깊은 내면(=의식적이 아닌 무의식, 본래의 내 모습), 본래의 내 마음은 주님 닮은 마음과 자비의 삶을 살고자 원합니다. 타인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하고 싶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살고자 원합니다. 예수님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 6,36)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끊임임이 자비로운 마음과 그 마음을 살아가려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처럼 하느님의 자비를(=호의와 용서, 사랑) 입을 것입니다.

 

 

 

자비(慈悲)의 성서적 의미

 

예수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다.(레옹 디푸르 53) 그분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에게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몸소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항상 반복하여 자비를 실제로 보이셨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6,36)라고 외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두 번(마태9,13; 12,7)이나 호세아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당신의 태도를 확고히 드러내 보이셨다:<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아 6,6)

 

성서에는 자비를 뜻하는 네 가지 다른 단어가 있다. 구약성서에서 자비를 나타내는 단어인 라하밈 rahamim은 <다른 사람에 대한 한 인간의 본능적인 애착을 나타낸다. 이 자비는 셈족에 의하면 어머님의 품rehem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레옹 디푸르 59) 이는 어머님의 다정다감한 사랑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자비롭다. 하느님의 자비는 항상 또 다시 하느님의 진노를 이긴다. 이 단어에 따르면,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어머니의 품안에 있는 것, 즉 내가 나의 내적인 아이에게 그 안에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보호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는 내 자신에게 어머니 노릇을 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격노하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 요구를 하지 않고 나의 내적인 아이는 내 어머니의 품과 하느님의 품에서 성숙해지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모습으로 될 것이다. 자비는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온유함과 호의와 사랑의 공간과 접하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를 가지고 내 안에 거주하고 계시는 곳에서 나는 치유될 수 있고, 바로 그 곳에서 나의 자아 비난과 자책감은 그 힘을 잃어버린다. 그곳에서 나는 진실로 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나는 내 모습대로 있어도 된다.

 

자비의 두 번째 개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 hesed이며 이는 그리스어에서 일반적으로 엘레오스 eleos로 번역되었다. 헤세드는 또한 은총과 충실성을 뜻한다. 엘레오스는 <의식적 의지에서 나오는 실천적 선이다. 그렇다. 그것은 내적인 의무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것이다.>(레옹 드푸르 50) 이는 부당하게 어떤 사람이 당한 불운을 보고 누군가를 사로잡는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정서로 표현한다. (불트만) 구약에서 엘레오스는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를 대하는 하느님의 자비스러운 자세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뜻한다. 하느님의 측은지심은 항상 하느님의 진노를 이긴다. 하느님은 측은지심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 신약성서에서는 엘레오스가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사람이 사람에게 취하는 자세>이다. 이는 <호의인데, 상호간에 베풀 의무가 있는 그런 호의이다.> 우리가 엘레오스의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만일 자비롭다면,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보다 더 부드럽고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친절하고 충실할 것이며 우리가 다른 사람을 표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엘레오스는 흔히 측은지심과 용서를 뜻하기도 한다. 나는 곧 내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단죄를 그만두어야 한다. 내 잘못을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

 

자비에 대한 세 번째 표현은 스플랑크논splagchnon에서 온 스플랑크니조마이 splagnizomai, 내장을 뜻한다. 내장은 상처받기 쉬운 감정이 있는 장소를 나타낸다. 신약성서에서는 공관복음사가들만이 이 단어를 사용했다. 더욱이 항상 예수께서만 친히 사용하시는 말로 썼다. 이는 예수님 행동의 신성神性을 특징적으로 나타낸다. 스플랑크니조마이가 사람의 행동에 사용될 때는 비유에서 뿐이다. 그러나 그 때 그 사람의 행동에서 묘사되는 것은 결국 항상 하느님의 측은지심이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에서(루15,20) 아버지의 측은지심은 형의 분노와 대비된다. 이는 사람의 강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온 마음으로 오류에 빠진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다. 공관복음 사가가 이 단어로 예수의 행동을 묘사하면 이는 항상 <예수의 메시아적인 특성>에 관한 것이다. 메시아로서의 예수께서는 당신의 행동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신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사람들과 함께 느끼시는 것처럼 사람들과 동감同感하신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마음속을 터놓으시고 그들이 당신한테 있는 상처받기 쉬운 감정이 있는 장소로 들어오도록 하신다.

 

우리의 행동에 관련해서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우리의 동정심에 호소하고 싶어한다. 내가 내 자신을 감지하면, 내가 병과 상처를 감지하면, 내가 내 안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 아이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내가 나를 자비롭게 대한다. 나는 내 상처들을 탐구하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공감하는 마음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나는 나에게, 내 실수와 약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 공감한다.

 

자비에 대한 네 번째 개념은 오이크티르모스 oikitirmos이다. 이 단어는 동정심을 표현하는데 여기에서의 동정심은 아프게 감동되어 있는 것이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측은지심으로의 동정심이다. 필립2, 1과 골로3,12절에는 스플랑크나와 오이크티르모스가 함께 사용되었다. 두 개 모두 서로 보완하고 함께 <마음으로 동감>하는 것을 의미한다. 루가는 그의 평지설교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oikitirmos>(루6.36)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과 동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원수에게 냉혹하게 화를 내면 안 되고 그들과 함께 느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수와 약점에 대하여 실망하기보다 오히려 함께 동감해야 한다. 우리는 <선과 악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겼고 반복해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런 우리 자신과의 동감이 우리를 하느님과 닮게 만든다. 우리를 하느님의 마음에 가까이 데려가는 것은 실수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약점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동감이다. 진심으로 측은히 여기는 것에서 우리는 사랑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무엇인가를 감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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