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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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또한 유언의 무게가 무거운 만큼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경험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누이가 죽어가면서 말 없는 눈빛으로 제게 마지막 선물로 남긴 말, ‘내 몫까지 살아’ 라는 유언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지금껏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너무 좋아했었습니다. 제 엄마 돌아가시기 전, 엄마는 제게 ‘신부, 아버지를 부탁해’ 라고 하신 유언의 말씀을 남기셨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었습니다. 아버지를 돌보려고 한 까닭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지만 그보다는 제가 사랑했던 엄마의 마지막 부탁, 유언에 대한 저의 사랑의 응답이었습니다. 엄마의 마지막 유언, ‘아빠를 부탁해!’

 

흔히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설교는 산상설교라고 말하지만, 저는 십자가에서 남기신 7가지 말씀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설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본디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고, 비록 짧지만 3년 동안 공적으로 활동하시면서 여러 곳에서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라워 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분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권위 곧 힘은 바로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여일如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말씀은 말로써 말씀하신 게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놓고 죽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架上 七言의 무게는 그러기에 그분께서 말씀하신 시공時空의 중요성과 함께 다가옵니다. 그런데 가상칠언은 당신 가신 길의 흔적을 더듬어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마지막 임종 전에 남긴 유언의 말씀입니다. 모든 말씀이 무겁게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죽음 직전 남긴 유언은 전혀 다른 무게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곧 그리스도인에게 무겁게 밀려옵니다.

 

예전이나 지금 노인 병원에서 죽어간 이들의 모습을 볼 때, 늘 떠오르는 표현은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은 살아 온 모습과도 같다. Quale vita, tale morte.’라는 문장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그분께서 사셨고 살아온 삶, 곧 사도직의 결과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그 결과 십자가상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살아 온 삶을 이해할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반응은 제 각각이었습니다. 어떤 시선은 십자가를 보면서, 그가 자신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전혀 하느님답지 않음이 여실히 폭로되는 시간이고 공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름지기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더 나아가서 십자가를 아예 제거할 강한 힘을 지녀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의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 보라지’(마태27,40이하 참조)라는 조롱이 결코 틀린 요구는 아니잖아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셔야 되시는데! 그러기에 훗날 사도 바오로는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코1,18.24)라고 선포하였는지 모릅니다. 역설적으로 ‘이 세상에서 힘이 가장 강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맞는 표현이라고 느끼는 것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분명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강함도 수치도 굴욕도 없습니다. 반면에 사랑하게 되면 지혜도 슬기도 냉철함도 우아함도 잃게 됩니다. 사랑 앞에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사랑하면 약해지고 어리석어 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럴진대 사랑이신 하느님이시야 오죽하겠습니까? 어느 분은 그래서 ‘하느님이 사랑에 빠지시면 현명함을 상실하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사랑에 빠져 하느님다움을 잃어버린 사랑의,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깨달은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약함과 어리석음이 사랑 때문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무슨 근거로 그 약함을 하느님의 강함이라 하고, 어리석음을 하느님의 지혜라고 주장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는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빛은 어둠에서 드러나며,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작동하고, 분열 속에 일치는 그 가치가 명백히 드러나잖아요, 이와 같이 하느님은 가장 하느님답지 않은 곳에서 가장 뚜렷하게 하느님다움이 드러납니다. 이를 꿰뚫어 본 존재가 바로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백인대장입니다. 그는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15,39)라고 고백했었습니다. 하느님의 부재의 순간이 가장 강력한 하느님의 공현의 순간이며, 십자가상의 죽음이 하느님다움의 현양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는 어리석음과 약함과 비천함의 상징인 십자가는 하느님의 지혜이며 힘이며 강함이 가장 맑게 밝게 드러난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사랑이 논리나 합리를 뛰어넘는 무모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지독히도 애달픈 가슴앓이를 하게 마련입니다. 어리석음과 약함은 본디 하느님다움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에 대한 당신 사랑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기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민수기 21,8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 것을 보면 살 것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3,14)고 말씀하신 까닭을 우리는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부들은 ‘십자가를 짊어질 때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가르쳤으며, 저희 수도회를 창립하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깨달은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남기신 7가지 유언을 믿음과 사랑으로 묵상하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7가지 말씀을 남기셨는데, 이 말씀은 골고타 언덕까지 넘어지고 쓰러지고 엎어지시면서 힘겹게 오르신 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다음에 남긴 말씀입니다. 모든 여정이 고통의 여정이었지만, 칠언七言을 유심히 듣다보면 고통의 시작하는 순간부터 절정의 순간을 따라 마침내 마지막 순간에 남기신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배경을 전제하면서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칠언 중에서 첫째, 넷째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세례와 타볼산의 변모의 순간에 들려왔던 때 말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17,5)이라는 말씀에 대한 응답처럼 고통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한 번도 아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다만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의탁에서 죽음을 맞대면하시면 꿋꿋이,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그 길이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순간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루카 23: 34)

 

예수님은 사랑의 존재였듯이, 그분의 삶은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완성과 절정은 십자가의 용서로 명백해집니다. 용서는 사랑의 정점입니다.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고통과 아픔을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하고 용서하셨습니까? 저는 1980.5.17일에 광주 화정동 피정센타에서 윤공희 대주교님으로부터 부제서품을 받고, 형제들과 함께 그 다음 날 5.18일에 순창 강천사로 축하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그 날이 바로 ‘5.18 민주항쟁’이 일어난 날이고, 그리고 5.24일 광주를 떠나는 순간까지 저는 광주의 비극을 제 눈으로 목격했었습니다. 서울로 되돌아와서 몇 날 몇 일 동안 아무런 말도 못하는 상태에서, 고통의 현장을 떠나온 자의 죄책감에서 짓눌려 살았습니다. 그때 제 입과 마음에서 솟구쳐 치밀어 오른 기도가 바로 “정의로우신 하느님, 저들에게 불벼락을 내려 주십시오.”라는 기도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가장 쉬울 것 같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리스도인다움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십자가상의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사람이며, 용서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다움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몫과 하느님의 몫이 있는데 , 인간은 의지로 용서하고 느낌으로까지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아 죽이려는 모든 사람을 십자가상에서 아빠 하느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당신 공생활 동안 사람들에게 용서하며 살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용서의 삶을 본으로 보여주시고,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모르는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아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친 이들뿐만 아니라 무죄한 자신을 사형선고로 이끈 지도자들과 그에 관련된 모든 이들 그리고 아직도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다움은 물론 하느님다움의 가장 진솔한 본질은 바로 용서에 있음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이 하느님다움은 바로 하느님만이 자비이시고 용서이시기 때문입니다. 첫 말씀을 발설하는 순간이야말로, 그분의 존재와 삶의 진정성과 진솔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인간의 무지가, 어리석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에 덧붙이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무지는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으며,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참으로 잘 몰랐으며,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 아드님에게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모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그 크신 자비와 용서하심에 의탁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윤리적인 축면에서 무지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미국 유학하던 중, 어느 날 핏츠버그 주교좌 대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좌회전을 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교통순경이 제게 자동차를 멈추라는 신호를 하기에, 자동차를 길가에 멈춰 세웠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자 로만칼라를 하고 있는 저를 그 순경이 보고서는 저에게 “신부님 불법 좌회전을 하였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여기서 늘 좌회전을 했었는데요.”라고 말하자,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부님, 규정이 변경되어 좌회전이 금지되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저는 잘 몰랐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저에게 “신부님, 모르는 것도 죄입니다.” 그때 그 순경의 말을 듣고 제가 깨달은 것은 ’모르는 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서 ’몰랐는데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르는 것도 죄이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루카 23: 43)

 

이사야 예언서의 예언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심은 바로 당신께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말씀하셨던 대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23,33) 이리하여 기묘하게도 골고타 언덕 위의 3가지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3가지 십자가는 각기 다른 십자가입니다. 좌도의 십자가는 죽음의 십자가이고, 중앙의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이며, 우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사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5,20)라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처럼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고, 함께 하신 그곳에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히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그 이유는 바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으며,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그토록 가까이 있었음에도, 예수님께서 체포와 신문, 사형선고 그리고 처형장으로 십자가 지고 가심,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순간까지 구원자이신 주님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렀지만 이를 알고 깨달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를 알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는 단지 그 시간 그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충만하게 내리지만, 이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은총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좌도는 구원자이신 주님과 함께, 주님 곁에 있었지만, 십자가 밑에 서 있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23,35),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2337)고 외친 것처럼 좌도 역시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23,39)라고 조롱할 뿐, 예수님도 볼 수 없었고, 사람들의 외침 가운데 들려오는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서 최초로 기록된 ‘복음’ 곧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요19,19)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사실 나약한 인간은 언제나 자기 방어 기제에서 다른 이를 무시하고 판단함으로써 스스로 만족하는 족속입니다. 흔한 말로 ‘동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 하였듯이 죄인이 죄인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이 무죄한 예수님을 모독하고 심판하며 단죄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덮어씌우는 사람들과 한 통속이 되어 좌도는 무지함과 치졸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혹여 우리 역시도 좌도와 같은 시선에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는 않았는지 성찰해 보아야겠습니다.

 

이에 반해 우도는 좌도의 어리석음을 꾸짖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23,40~41) 그렇습니다. 우도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인 까닭은 단지 예수님의 구원 약속을 받으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도는 시편 50장의 다윗처럼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얻었삽고, 당신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판결하심 공정하고 심판에 휘지 않으심이 드러나리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과 자신의 죄를 인정한 솔직한 사람입니다. 더더욱 우도는 자신의 고백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배척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깨달은 바를 진솔하게 용기를 갖고 고백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자신은 사형선고를 받아 곧 죽게 되었지만, 그 십자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모독과 조롱 하는 모습과 소리들을 듣고 보면서, 그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용감하지 않으면 감히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다들 흰 콩을 검은 콩이라고 우겨대는 상황에서 혼자 ‘이 콩은 검은 콩이 아니고 흰 콩이 맞습니다.’고 말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더욱 유력한 예수님이 아니라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라볼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이사야53,2)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23,42)라고 의탁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가오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해야 하실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자신의 눈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도는 구원을 청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우도의 고백은 신앙고백의 다른 모습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흔한 말로 교리나 신학의 앎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앎은 겨자씨 한 알보다 더 작았지만, 그의 구원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마태19,24) 것보다 더 쉬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앎이 전부가 아니고, 다만 앎이 필요한 것은 믿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우도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된 첫 사람입니다. 구원은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음으로써 주어집니다. 우리 또한 우도처럼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이 용서의 말 한 마디가 죽어가는 그의 영혼에 얼마나 크나큰 위로가 되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내일’이 아닌 ‘오늘’ 주님과 함께, 그것도 어둔 지옥이 아니라 ‘낙원’에 있을 것이라니 이 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오늘’ 죽음도 없는 곳, 눈물도 고통도 없는 곳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단지 예수님께서 우도에게만 하셨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한 약속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

 

아주 오래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저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뮤지컬을 보았었습니다. 그러고 난 뒤 한 참 후에 우연히 미국의 켄 카이어 목사라는 분이 저처럼 ‘레미제라블’을 보고 난 뒤, 예수님 곁의 우도와 장발장의 공통점이 도둑이라는 점을 착안해서 다음과 같은 참회 글을 썼더라고요. 그분의 글을 조금 각색해서 올립니다.

 

<우리는 도둑입니다. 당신도, 저도, 짧은 인생의 마을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훔쳤습니다. 아무도 안볼 때 작은 것들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사탕 하나, 조그만 장난감. 하찮은 연필 하나 그리고 얼마 후에는 남이 작성한 시험지에서 커닝하면서 해답을 훔쳤고, 다시 얼마 후에는 다른 사람의 신체로부터 쾌락을 훔쳤습니다. 물이나 빵을 훔치고 몰래 먹던 그 짜릿함. 쾌감. 욕구. 그것이 한 덩어리로 어울려 엄연한 도둑질이 되지 않았나요? 그러나 우리가 가담한 도둑질이 또 있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정말 솔직히 말한다면, 우리의 기록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분노로 언성을 높였을 때, 우리는 평화를 한 조각 훔친 것입니다. 거짓말을 했을 때, 우리는 진리를 한 조각 훔친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되 사랑으로 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누군가를 하느님 나라의 국경 밖으로 좀 더 밀어냄으로써 그 나라를 한 조각 훔친 것입니다.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칭찬을 거둔 채 침묵했을 때, 우리는 땀 흘리고 희생하며 일한 사람에게 임금을 주지 않은 것 못지않게 분명히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분란을 일으켰을 때, 우리는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 화목과 화합을 한 조각 훔친 것입니다. 강요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한 조각 훔친 것입니다. 비아냥거렸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한 조각 훔친 것입니다.

 

분노, 거짓말, 시기, 탐욕과 정욕. 험담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 전과가 있습니다. 저도. 당신도, 우리 모두 한 번쯤 이런 일을 하거나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우리 중 누가 있을까요? 도둑은 도둑입니다. 편의점을 털든 컴퓨터로 회사를 털든 헛소문으로 남의 명예를 털든 도둑은 도둑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야 하찮은 가게 좀도둑 아닌가요? 아주 시시한 도둑질, 거기다 남들도 다 하는 일이 아닌가요? 그러나 우리에게 시시해 보이는 것이 하느님에게는 더 커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절도에 혀가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치명적 무기를 앞세워 훔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유죄입니다. 잡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유죄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혐의자로 지명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유죄입니다. 선고를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변호의 여지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죄보다 크십니다. 그분의 자애가 우리의 불순종보다 크십니다. 그분의 자비가 우리의 악의와 시기보다 크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미움보다 크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이 한 마디 말에 녹아 있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조건 없는 약속입니다. 예외 없는, 유보 없는 약속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는 이 말씀은 ‘믿음이 좋다면.’이 아닙니다. ‘순종을 잘하면’이 아닙니다. ‘기준에 도달하고 시험을 통과하고 점수가 좋으면’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제안이 아닙니다. 왕의 선언이며 선포입니다.>

 

이 엄청난 선물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물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까요? 십자가에 달린 우도처럼 겸손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갚사오리.”(시115,3)라고 노래한 것과 달리 은혜 갚으려고 하기보다 그냥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 감사하면서, 주님 은혜와 똑같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으로 갚으면 됩니다.

 

 

3. “이 분이 바로 네 어머니시며,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27)

 

성가 490장 ‘십자가에 가까이’ 간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까이 가셨던 성경의 인물들처럼 단순히 육신으로 십자가에 가까이 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바로 십자가 밑에서 태동하고 시작한다.’는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가까이’는 영적으로 십자가 밑까지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존재의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시간 십자가 밑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위태롭게 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뒤흔드는 적대자의 확실한 제거를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군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임무 수행을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냥 구경꾼처럼 호기심에서, 어떤 여인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운 마음에서,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마리아 막달레나와 사랑하는 제자들은 바로 사랑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가는 가장 영적이고 탁월한 행위는 바로 미사참례입니다. 미사 중, 제대에서 주님의 십자가 제사가 재현되고,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로 미사에 참석하고, 그 미사를 어떻게 참여하고 있습니까? 주일 미사를 궐하면 죄가 된다기에 의무감으로, 친구 따라 강남 가는 마음에서 부모의 잔소리 때문에, 심심풀이 혹 지극히 개인적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혹 교우 관계를 통해서 장사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아니면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성경의 인물들처럼, ‘주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불’이라 생각해서 한 주간의 길잡이 그리고 그 말씀을 살아 갈 주님의 사랑을 보고 맛들이기 위해서 가십니까?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등장하신 장면이 4복음에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요한복음 2장과 19장에 나오는 복음 내용은 참으로 그 의미의 깊이에서, 그 내용의 넓이에서 저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성경 이야기입니다. 요한 2장의 카나의 혼인잔치는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 부분이며, 혼인의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예수님의 첫 기적을 일으킨 순간이고 자리였습니다. 물에서 포도주로 변화를 통해서 예수님의 능력이 한껏 발휘되었으며 제자들은 이를 보고,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기적이 일어나시도록 성모님께서 다른 사람의 난처함을 먼저 알아보시고, 당신 아드님의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간청하셨기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복음은 성모님의 중재성이 여실히 드러난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2장과 달리 19장은 공생활의 마지막 부분이고, 기쁨이 아닌 슬픔이 넘친 임종의 순간으로 어둠이 가득 차고 넘치는 시공으로 성모님의 가슴에 창이 찔리듯 아프고 또 아픈 순간입니다. 19장에서 예수님의 철저히 무능과 무력이 드러난 가운데 제자들 모두 도망치고 오직 몇 몇 사람만이 십자가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인의 부족함을 예민하게 감지하시고 아드님께 간청하셨던 어머니 마리아는 19장에서는 남의 일처럼 철저히 침묵하고 계십니다. 왜 이토록 대조적이고 극단적인 차이를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이토록 상이한 어머니 마리아의 태도는 타인에 대한 여성스런 배려와 신앙적인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수용과 동의의 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母性의 측면에서 보자면, 무죄한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은 죄가 없다.’고 항의도 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눈물로써 석방해 달라고 원성을 터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아드님의 탄생의 순간부터 지금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순간까지, 이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이라고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는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기에 성모님은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아드님을 보시면서 성모님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면서 울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침묵은 믿음이며, 이 침묵은 항변이나 웅변보다 강한 믿음의 힘입니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치사를 당해 장례를 치룰 때 종철 아버지는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이렇게 아들의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겪으면서 종철 아버지는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마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겪게 되면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기 마련이고, 성모님 역시도 어떻게 당신의 애통함을 표현할 수 없었기에 치열한 침묵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 여인들과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되었지만, 교회는 ‘사랑받는 제자’가 요한 사도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름 없는’ 사랑받은 제자는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가까이 가려는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제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유언을 듣고 받든 제자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모실 수 있는 이 엄청난 특은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그 홀로 십자가 밑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이 바로 네 어머니시다.”(요19,26)고 예수님의 유언을 듣습니다. 이로써 사도 요한은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실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유일한 사도가 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갈 때 우리 역시도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실 수 있는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榮光입니까?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몸은 물론 마음고생으로 힘겹게 살아오신 어머님의 처지와 마음 상태를 아셨기에, 아니 지금껏 제대로 효도하지 못하셨기에,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19,27)라고 요한을 아들로 내어주시면 위로해 주십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과거 당신이 말씀하셨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8.50)라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이야말로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이루기 위해 죽어가고 있지만, 당신 어머니 마리아 또한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시느라 별별 고초를 다 겪으신 참된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성가 248번 ‘한생을 주님 위해’의 가사를 인용하렵니다. <한 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주님의 뜻을 위해 슬픔도 삼키신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

 

복음에서,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 본문을 직역하면, 요한은 마리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아오스딩 성인은 여기서 ‘자신의 것’이란 ‘자신의 소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영역’ 안에 항상 함께 계신 분으로 성모님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 우리가 어떻게 성모님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자비를 담는 그릇이고 지금도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 자비’의 중재자이십니다. ‘자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하느님의 자비‘의 도구이자 연장으로 저희에게 자비를 중재해 주시고 계십니다. 다함없는 마음으로 자비의 어머니께 ’자비로운 눈으로 저희를 굽어보소서.‘ 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사도 요한처럼 어머니 마리아를 우리 각자의 집에 모셔드립시다. 물론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지만, 믿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을 때 참된 그리스도교적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기꺼이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갈 때, 그리스도인은 성모님의 중재로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함께 살고 참여하게 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동참한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가까이 밑에 서 있는 것입니다.>

 

4,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 46)

 

예수님께서 네 번째 유언을 남기시기 전과 후의 상황을 먼저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다음을, <낮 열두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27,45)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묵중하고 농축된 이 표현은 마치 창세기의 천지창조 때에 심연을 뒤덮고 있었던 어둠을 연상시킵니다. 이 표현은 바로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죽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버림받으신 고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순간을 이해하려면 우리 또한 영신적 고독을 통하여 느낀 ‘버림받은 상태’를 먼저 숙고하고 음미할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남긴 유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빠 하느님께 버림받은 상태에서 극단의 고통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이 극단은 다름 아닌 ‘단죄받은 이의 형벌’, ‘지옥의 형벌’을 당하고 계심을 말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번뇌와 고통이라는 극단의 절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빠 하느님에게서 마저 버림받은 예수님! 우리 또한 살다보면 예수님처럼 ‘버림받은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상태는 바로, 슬픔. 고뇌, 고독. 무미건조함. 어둔 밤, 인정받지 못함 등.

 

물론 예수님의 울부짖음은 분명 하느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 서 있던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예수님께서 분명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울부짖으셨지만, 이를 오해하고서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27,47)라고 단정 짓습니다. 결국 ‘버림받은 예수님’께서 통과해야만 했던 ‘오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해받지 못한 아픔’입니다. 물론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가장 친근한 고향사람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예수님은 모르는 타인에서부터 그리고 제자와 가족들에까지 ‘이해 받지 못한 아픔’을 토로하는 기도가 우리 마음을 흔듭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때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이해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의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사랑하는 이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저 사람을 도우려 하나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를 돕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모를 때도 있고, 때로는 우리가 주려던 것을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군중들을 이해하려고 애쓰신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이해 받지 못했지만, 완전히 사랑하려고 했었습니다. 사람들을 이해하신 예수님과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예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인용했습니다. 여러분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경우를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때 바로 예수님의 이 기도를 바치십시오.

 

예수님은 고통의 절정에서 시편 22, 1절을 인용해서 하느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비명과 함께 울부짖으신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당신을 따르던 군중들도 떠나고, 제자들마저 다 떠나버린 극단의 상황까지 밀어붙이시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담긴 비명이라기보다는 역설적으로 ‘이삭’을 죽음의 순간에 구하신 하느님을 향해 마지막 신뢰의 외침이었습니다. 이 외침은 극단적인 ‘버림받음’을 나타내지만 이 외침에는 아빠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가 깃들여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주님, 당신께서는 멀리 계시지 마소서. 저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생명을 칼에서, 저의 목숨을 개들의 발에서 구하소서. 사자의 입에서, 들소들의 뿔에서 저를 살려 내소서. 당신께서는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 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시22, 1. 20~23) 수난 사화의 절정의 순간에서 발설한 이 기도는 아버지를 부르는 호소입니다. 이 기도는 이 순간 예수님께서 느끼신 어둠과 버려짐과 그리고 이해받지 못함 가운데서 새로운 지평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부터 위로와 평화의 흐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5. “목마르다.” <요한 19:28>

 

예수님의 목마름은 글자그대로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최후만찬 중에 포도주를 마신 이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느라 지치셨고, 밤새도록 대제사와 빌라도로부터 심문을 받으셨으며, 사형선고를 받으신 다음 옷을 벗기고 머리엔 가시관을 쓰셨으며 채찍질 당하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까지 오르신 다음 양손과 양다리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상처 입은 머리에서부터 못 박힌 양 다리까지 피를 흘리셨습니다.

 

전쟁 중에 총상을 입은 병사는 다친 부위의 아픔보다 타는 목마름을 더 호소한다고 합니다. ‘물, 물, 물을 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으며 더더욱 한 낮의 뜨거운 햇살로 육신의 수분이 증발하고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우리의 몸은 70% 이상이 수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기 직전까지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기에, 십자가상에서 “목마르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저는 1986년 처음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그때 미국에서부터 함께 출발한 여행자 한 분이 ‘십자가 길’을 걷다가 4처에서 갑작스레 쓰러져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사망 원인이 바로 일사병과 탈수증이었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의 한 낮의 뜨거움은 실제로 목마름을 느끼게 만듭니다.

 

‘목마르다’는 의미는 육체적인 차원을 넘어서 심리적으론 수치심을 유발하고, 영적으론 버려짐을 통한 외로움을 심하게 느끼면서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의 목마름입니다. 그토록 온 존재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랑하고 치유하면서 그리고 용서를 베풀며 살았는데, 아무도 자신에게 물 한 모금을 주는 사람이 없음에서 오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의 갈증을 예수님은 느끼셨던 것입니다. 물 대신에 사람들은 조롱과 야유를 당신에게 쏟아내신 것을 듣고 보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이해에 대한 목마름을 절실히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시려고>(19,28) ‘목마르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한 일을 인정받지 못했고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야유와 조롱을 겪으셨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셨기에,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였기에, 기꺼이 십자가에서의 목마름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로써 당신이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뜻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이 곧 하느님의 뜻에 대한 목마름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맡겨진 일을 다 마치신 후 십자가상에서 ‘목마르다.’고 토로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까지 기도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슬픔과 눈물을 흘린 까닭을, 그리고 그 의미를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목마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극도의 목마름을 체험하심으로 우리의 영과 육의 목마름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고통으로 인한 목마름으로 신음하기 전에, 배신의 목마름으로 아파하기 전에, 소외의 목마름으로 괴로워하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목마름을 겪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목마름은 단지 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영적인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질곡의 삶을 살면서 겪을 생명에 대한 굶주림과 사랑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와서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551)고 외친 이사야의 초대처럼 예수님도 이제 목마른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 밑에서 목마르신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영육의 목마름은 해소될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목마름을 느끼고 있으며, 다만 삶의 자리에 따라 목마름을 더 느끼느냐 덜 느끼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목마름을 단지 육체적 목마름으로만 보지 않고 ‘영적 목마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근원적 갈망과 갈증을 느끼는 우리의 아픔을, 그 목마름을 향한 외침을 이해하셨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 그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영적 갈증이며 목마름이 아닐까요. ‘아직도 나는 배고프다.’는 히딩크 감독의 표현처럼 아직도 우리는 목마릅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생명에 대한 배고픔과 참 사랑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느님 제가 배고픕니다. 내 인생이 목이 타서 죽겠습니다.’고 울부짖는 우리를 향해 ‘다 나에게 오너라.’고 초대하십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시42,2~3) 우리네 인생의 갈증은 우리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채워지지 않는 한 결코 해갈될 수 없는 목마름입니다. 이 영적 목마름이 해갈되지 않으면 평생을 허우적거리다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는 ‘아쉬울 것 없으며, 푸른 풀밭에 우리를 쉬게 하고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우리를 이끄시어 우리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우리를 끌어 주십니다.’(시231~3)라는 시편의 말씀이 실현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시다가 시카르 마을의 야곱 우물가에서 지친 몸을 잠시 쉬셨습니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정오 무렵에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오자, 그녀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4,7)라고 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까닭은 대낮에 먼 길을 걸어오셨기에 실제로 목마르셨습니다. 그러나 ‘물을 좀 다오’라는 표현은 당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이 여자를 당신에게 이끄신 아버지의 뜻을 감지하시고 그녀의 인생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고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외면으로 드러난 ‘유다 사람이며 낯선 남자’의 요청에 거절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4,10)고 말씀하십니다. 정작 목마른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서 차츰 그녀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갈망과 사랑에 대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시인 구상은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는 시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우리의 갈망과 갈증을 아주 단순 소박하게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오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무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인생의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운명이려니 하면서 체념하고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살아왔었지만,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서 생명에 대한 갈구와 사랑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고 해소한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4,14) 우리 또한 그녀처럼 갈망과 갈증을 짓누른 채 자신의 죄와 죄책감의 감옥에 갇혀 목마른 인생살이를 살아왔다면, 생명의 샘이신 예수님을 만나 우리네 존재 깊이 억눌렸던 갈망과 갈증을 해소하고 사슴처럼 달려갑시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4,29)라고 또 다른 목마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합시다.

 

오래 전 저는 ‘사랑의 선교회’에 가서 미사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의 선교회’ 수녀원 미사를 갔을 때, 특이하게 감실 위에 ‘목마르다.’고 쓴 액자가 눈에 다가왔습니다. 그때 저는 ‘사랑의 선교회’의 영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죠. 마더 데레사 성녀가 바라 본 세상의 표징은 예수님의 시선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생명과 사랑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는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끝나지 않은 고난이요 목마름입니다.

 

 

6. “다 이루었다.” <요한19:30>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겉으로 볼 때는 실패자의 모습이었고 패배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19:30) 이렇게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외침은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의 외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신 것일까요?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라는 단어는 성취와 파국의 이중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사랑을 ‘끝까지’ 실천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이와 반해 제자들은 배신과 배반의 끝까지 갔으며, 군중들도 군중심리(=자신의 주체적인 판단과 사고의식 결여)에 휘둘려서 무모함의 끝까지 갔습니다. 성지주일부터 성금요일까지 전례를 따라가다 보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차이는 이렇습니다. 성지주일에 ‘호산나, 호산나’하고 환호하고 환영했던 군중들은 금요일엔 언제 그랬느냐 하듯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칩니다. 물론 지도자들은 이 모든 비극의 발단은 예수님께 있다고 그 탓을 예수님께 몰아세우면서 잔인함과 포악함의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 종으로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모든 일들을 다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이 말씀은 주인이 자기의 종을 불러서 어떤 일을 시킬 때, 종이 맡겨진 일을 다 마친 후에 주인에게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습니다.’ 라고 보고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고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 섬기는 종, 고난 받는 종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2,6~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일생동안 하느님의 섬기는 종으로 사셨습니다. 종으로서 섬기는 삶의 절정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뜻을 버리고 십자가에 달려 자기 목숨을 바쳐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하느님께서 명하신 일을 다 이루신 것을 아시고, 종으로써 하느님께 보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께서 제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이제 제가 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 또한 앞서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1베2,20)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종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시고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삶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 역시도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서 일생동안 우리가 하느님의 종으로써 어떻게 섬기는 삶을 살았는지를 직접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또한 ‘제가 하느님의 뜻을 다 이루었습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인용한 마태오 20,28절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께 지고 있는 모든 죄의 빚을 다 갚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는 말은 또한 ‘빚을 다 갚았다. 부채를 다 갚았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하느님께 엄청난 빚을 지었습니다. 원래 ’죄’라는 말은 ‘빚’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의 빚은 우리를 지옥에 던져서 그곳에서 영원히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의 빚을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18,23~35참조)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지고 있는 죄의 빚이 얼마나 엄청난 금액의 빚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로6,23)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값을 갚아야 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그 죄에 대한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진 엄청난 죄의 빚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다 갚았다!’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죄인인 우리가 진 빚을 대신 다 갚아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죄의 품삯은 죽음이었지만, 이제 죽음의 품삯을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1코15,55)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셨습니다. 화가들이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뒤로 물러서서 그 작품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작품이 완성되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위대한 구속 사업을 완성하였습니다. 구원의 위대한 작품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더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다 이루어 놓으시고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에2,8~9)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구원이고생명이 됩니다성가 30장 승리의 십자가’ 후렴, <십자가 승리하네 우리 구원하리라 십자가 승리하네 우리 구원하리.>라는 가사처럼 우리는 승리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며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와 함께해야 합니다승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며매일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상에 십자가 신비를 선포하며 살아야 합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인해 우리의 인생도 완전히 승리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이런 맥락에서 저희 수도회 <십자가 찬미>라는 노래를 들려 드립니다.

<십자가상에 한 사람 있네왜 죽으셨는지 말해다오인간의 죄로 수난 하셨네우리 위해 숨 거두셨네십자가상에 한 사람 있네홀로 매달려 계시면서 나에게 가르쳐 주세요그의 죽음을 왜 몰랐는지그날을 몰랐던 사람 있고 무심한 사람도 있었다네집단으로 생애를 바침으로 그 일을 세상에 알리려네손에 손에 십자가 들고 곳곳에 임 사랑 전하려네십자가상에 한 사람 있네온 세계 알기를 바라노라.>

 

 

7.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가 23: 46>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통하여 선포되는 십자가 복음은 제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아버지를 부름으로 시작합니다십자가 처형의 최정점인 제4예수님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습니다가상칠언의 마지막인 제7예수님은 아버지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라고 아버지를 부름으로 끝납니다예수님은 고통의 매 순간마다 아버지를 부르시고 내 앙식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아버지의 일을 완수하는 것입니다.”(4,34) 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다음 이제 자신의 존재 전부인 육신과 영혼마저 아버지께 온전히 봉헌하십니다예수님은 우리 또한 삶의 여정 가운데 닥칠 수많은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도 함께 계시는 아버지를 인식하고 의식하면서 의탁하도록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특별히 예수님은 아버지란 호칭을 좋아하셨고 아버지를 자주 부르셨습니다. (산상설교 중 17다락방에서 45요한 17장에서 6아버지를 부름이 사랑이며 생명이고아버지를 부름이 믿음이며 희망이었기에 삶의 마지막 순간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온전히 맡기며 의탁하신 것입니다어쩌면 우리의 신앙 여정은 아버지의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있으며이 모든 일을 다 이룬 다음에 예수님처럼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라고 의탁하는데 있음을 이제 깨닫습니다저의 첫 서원 배너의 문구와 모양이 바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였습니다그때는 그 의미의 깊이를 잘 몰랐지만 오랫동안 이 말씀을 마음에 품으면서 주님의 뜻을 찾고 살아오다보니 이제야 내 영혼을이란 말씀이 저에게 위안이 되고 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저의 바람은 이제 분명합니다예수님처럼 마지막 순간모든 일과 삶을 다 마치는 순간 저 또한 아버지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Laing 이란 심리학자는 ‘아이들과의 대화’라는 책에서 아름다운 자신의 체험을 소개합니다. 어느 날 자신의 부부가 갈등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어린 딸아이가 자신의 서재로 들어와 평소와 다른 몸짓을 하더랍니다. ‘애가 뭘 말하려는 거지’ 하면서 유심이 바라보았더니, 그 아이는 서재의 양 벽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작은 종이를 부치더랍니다. 그래서 딸을 붙잡고서 물었죠. “애야 지금 뭘 하고 있니” 라고. 그러자 그 아이는 “가슴”, “가슴이라고”, “응. 가슴 하나가 사랑해”, “가슴 하나가 사랑한다고”, “응, 가슴 하나가 아주 많이 사랑해”라고 응답한 것을 듣고서야 딸아이가 아빠인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가 온 몸으로 부딪힌 벽은 갈등을 겪고 있는 엄마와 아빠이며, 엄마와 아빠의 화해를 위해 작은 몸을 던지면서 작은 가슴 하나가 엄마와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하신 일이, 바로 어린 소녀가 엄마와 아빠의 갈등과 단절을 풀고 화해를 위해 온 몸으로 부딪힌 것처럼 예수님 또한 화해와 친교를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사람들과 단절, 사람과 사람과의 단절 그리고 참자신과 거짓 자아와 분열과 단절을 끊고 화해하도록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화해, 나와 너의 화해 그리고 거짓된 자아와 참 자신과의 화해를 이루고 친교를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 남긴 유언, 가상 칠언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갑시다. 그렇게 살려고 할 때, 예수님의 부활은 물론 우리의 부활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죽는가? 당신의 가짜 자기가 죽는다. 정말로 그럴 수 있는가가 아니라 단지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누가 사는가? 태초부터 살아계셨던 하느님 자기(God Self)가 이제 당신도

포함하게 된 것이다.

죽는 것은 ‘무엇’이지만, 사는 것은 ‘누가’라는 점을 주목하라.>

 

<잠든 이여, 깨어나라고 나는 너에게 명령한다.

나는 너를 지옥 속의 죄수로 갇혀 지내도록 창조하지 않았다.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나는 죽은 자들의 생명이다.

일어나라. 내 손이 되어라. 너는 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일어나라. 이곳을 떠나자.

너는 내 안에 있으며 나는 너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한 인격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분리될 수 없다!>

- 부활절 전야를 위한 옛 설교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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