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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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행복 강의 5: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할 것이다.”와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시편 42 2~3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에서 <목마르다.>는 것은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며, <흡족하다. 만족하다.>는 본디 <배부르다.>는 뜻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배불리 먹이실 것입니다. 충분히 베푸시고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막에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단식을 하시고 난 뒤 몹시 허기지셨으며(마태4,2), 야곱의 우물가(요4,7)와 십자가 위에서(요19,28) 목마름을 실제로 겪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따르던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공감에서 측은한 마음을 보이셨고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마태15,32 이하 참조)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육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넘어서 영적인 차원에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초대하시고, 오늘 우리가 들은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 질 것이다.>고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그러기에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테4,4/신8,3)고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생명의 말씀이며 진리의 말씀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악인과 거짓의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박해를 받게 되겠지만 마침내 흡족하고 만족할 것이라는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사람이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도리인 仁義禮智信에서 언급한 義와, 정의正義Justice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교적 의와 성서적인 의와는 거의 유사하다고 봅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정의는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德입니다. 그러기에 성서가 지속적으로 정의와 마찬가지로 의인에 대해서도 말하는 까닭은 의인은 참된 정의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삶과 활동을 통해서 살아가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의인은 정직하게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라틴어 ‘Jus’는 직각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의인은 빗나가지 않고, <제 길을 굳게 지킨다.(새번역) = 가던 길을 꿋꿋이 간다.(구번역)>(욥17,9) 와 <흠 없이 걷는 사람은 의로운 이! 행복하여라.>(잠20,7)고 성서는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서에서 가리키는 의인은 다른 사람에게 올바르고 관대하며 무엇보다도 선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아울러 의인은 하느님에게서 올곧고 충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살며>(하바2,4)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올바른 것을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시37,28) 그러기에 <의인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분께 피신하고 마음 바른 이들은 모두 자랑스러워 하며>(시64,11)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그 향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 의로운 사람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그 기억은 잊혀지지 않으리라.>(집35,8~9) 이처럼 의인은 올바른 사람이며, 요셉이 의로운 사람으로(마태1,19) 주님께 인정받은 것은 그의 존재 자체와 삶 자체가 하느님 보시기에 올곧고,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천하시고 가르치신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마태오 5~6장의 성서적 해석은 의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5, 1~ 19 서론, 5, 20~48 살인-간음-이혼-맹세-보복-원수 사랑,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규정을 초월해서 법의 의도를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다, 6, 1~18 권고: 자선-기도-단식.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6, 19~ 34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는 권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불교의 8정도는, ① 정견正見:올바른 이해로서, 존재의 본질에 대하여 사성제로 설해지는 불교적 진리관을 확신하는 것이다. ② 정사유正思惟:정견에 따라 철저히 실천하겠다는 각오이다. ③ 정어正語:거짓말, 중상하는 말, 모욕하는 말 따위를 삼가하는 것이다. ④ 정업正業:생명을 해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부정한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⑤ 정명正命:불교의 가르침에 부응하지 않는 직업은 택하지 않는 것이다. ⑥ 정정진正精進:나쁜 마음가짐을 피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계발하는 것, ⑦ 정념正念:신체와 감정과 사고의 움직임에 대하여 깨어 있는 것이다. ⑧ 정정正定:바르게 집중하여 명상하는 것입니다.

 

義人은 하느님 시선에서 올바르게 살려 하고, 의롭게 살아가기에 그에 따른 거부와 배척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사실 義는 양면적인 면 곧 도전challenge과 모순paradox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있는데 왜 이렇게만 살아야 하는가? 의인의 삶은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모순 중의 모순, 도전 중의 도전하는 삶이 바로 의를 사는 길이며 삶입니다. 그러기에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올바르게 몸소 정의를 실행해야 합니다. 물론 의인은 악인에 대항하지는 않지만, 의인은 불의에 침묵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라는 말씀의 의도와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다움과 자기가 해야 할 바를 묵묵히 실행하면서 살아가도록 분투 노력할 뿐입니다. 이처럼 정의는 신앙에 그 근원을 두며 믿음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자기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의인은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루1,53), <목마른 사람은 나에게 와서 마셔라>(이55,1)고 하신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올바르고 거룩한 삶’을 충실히 따를 뿐이며, 주님께서 먼저 흡족해하실 때 의인 또한 만족합니다.

 

<의인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5,6)에서 <흡족洽足해지다.>란 표현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여 만족함을 느끼는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흡족 대신 만족으로 표현했습니다. 아울러 ‘흡족해질 것이다’ 혹 ‘만족할 것이다.’는 표현은 시편 23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노래에 이미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막에서도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신 하느님께서 정의를 위해 어려움을 견디어 내면서 충실히 살아 온 의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선포하신 약속이며 참 복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예수님의 선포처럼, 의로움을 살다 보면 피할 수 없이 박해를 받게 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역사가 그러했고,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의로움을 선포하고 살았기에 박해를 받았으며, 그 결과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진복팔단에서, 첫 행복이 다른 모든 행복의 시작이자 근원이라면, 여덟 번째의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복은 선언의 마무리입니다. 어떤 면에서 시작과 끝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이 두 행복은 현실적으로 서로 같은 보상을 받습니다. 즉 하늘나라,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살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속하고, 그들의 소유입니다. 사실 모든 진복들은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고 있지만, 마지막 진복은 다른 복과 달리 특별한 은총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색다른 표현을 추가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2) 이처럼 마지막 진복은 특별한 세말의 파스카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로마서 8,17에 나옵니다.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어쩌면 이런 마음의 갈망을 시편 69편에서, <주님 때문이 아니오리까? 주님 하나만이 나의 삶의 전부이시다.>고 노래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5,11) 어쩌면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세상의 반대와 배척을 겪으면서 훗날 당신의 제자들이 직면할 박해를 염두에 두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0,28)고 당부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2118)는 말씀처럼, 훗날 베드로 사도 역시 십자가형을 당하였지만, 이를 예감하듯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1베4,14.16)라고 담대하게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박해는 교회사를 통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박해를 받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박해의 순간,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가 되면 너희 안에 계시는 아버지의 영께서 일러 주실 것이며, 다만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10,19~20;5,4)라고 미리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박해는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 때문에 받는 큰 고문(=십자가 처형)에서부터 일상사 작은 일에서 겪는 오해와 고통, 육체적인 박해와 정신적인 폭행, 온갖 형태의 권리 침해와 인격적 무시 그리고 억울한 일과 적개심, 괴롭힘, 불신과 오해 등 매일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박해는 그 강도强度면에서나 지속 기간 면에서 그 정도가 여러 가지로 다릅니다. 박해가 죽음과 연결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순교라고 부릅니다. 순교는 여덟 번째 진복 가운데서 등급이 가장 높은 것입니다. 박해받고 재판받고 사형을 당하신 그리스도와의 합일이 순교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악마는 존재한다.>는 책을 통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박해는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의 역사는 언제나 박해가 있었다. 스테파노의 박해로부터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사울이 했던 것처럼 박해는 잔인하다.> 그런데 교황은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지 않은 다른 박해에 대해서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박해의 첫 번째 형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에 기인하고, 그래서 명시적이고 분명한 박해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박해는 교양으로 가장하고, 근대성으로 가장하고, 진보로 가장한다. 조금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점잖은 박해이다. 그러한 박해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의 가르침을 추구하고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들 안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박해이다. 아울러 인간에게서 자유를 박탈하고 양심의 저항도 박탈하는 박해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해방시키셨지만. 이 박해는 우리에게 자유를 잃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벌을 받을 것입니다. 일자리와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것이고 아니면 따돌림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박해입니다. 그리고 이 박해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스테파노의 박해에서 지도자들은 학자, 율법 학자, 대사제들이었습니다. 반면 점잖은 박해의 우두머리는, 예수님이 그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우두머리입니다. 그것은 권력이 하느님 자녀의 품위를 거스르는 태도와 법률을 강요할 때, 그를 박해하고 창조주 하느님을 거스를 때 나타납니다. 이것은 엄청난 배교입니다. 그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러한 두 가지 박해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겠지만 그리스도인은 순교자 곧 증인입니다.>

 

 

지난 5번의 강의를 통해서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묵상해 왔습니다. 참된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에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잘 살고 못사는 게 무슨 대수입니까?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본마음, 속마음을 읽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 살려고 노력하고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의연하게 맡기고 살아갑시다. 뮤지칼 서편제 OST이며 차지연이 부른 <살다 보면>이란 노랫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혼자라 슬퍼하진 않아 돌아가신 엄마 말하길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 말 무슨 뜻인지 몰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주문 같아 너도 해봐 눈을 감고 중얼거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봐 엄마가 쓰다듬던 손길이야 멀리 보고 소리를 질러봐 아픈 내 마음 멀리 날아가네 소리는 함께 놀던 놀이 돌아가신 엄마 소리는 너도 해봐 눈을 감고 소릴 질러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봐 엄마가 쓰다듬던 손길이야 멀리 보고 소리를 질러봐 아픈 내 마음 멀리 날아가네> 물론 이 노래의 핵심이라고 할 표현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말에서 ‘살아진다’를 어떤 분은 ‘사라진다.’고 들려서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허나 저는 고달픈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신 엄마가 ‘살다 보면 살아진다’고 말씀하셨던 말을 반복해서 노래하다 보면, 고단하고 힘든 삶이었을지만 그래도 살게 되더라는 바람의 노래라고 느껴집니다. 그냥, 매일매일 사노라면 분명 좋은 날이 오리라는 희망으로 살아왔던 우리 부모님들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기에 저는 이 노래가 좋습니다. 이 노래를 듣노라면 질곡같은 삶 속에서도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고 노래한 시편 작가의 바람의 기도처럼 들려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걸으셨으며,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삶은 우리처럼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런 삶 가운데서도 복되게 사셨고, 동일한 상황에서도 동시대의 사람들이 체험하지 못한 참된 복을 사셨는데 바로 그것이 진복 8단입니다. 이제 우리 또한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살려고 애씁시다. 비록 부족했고 때론 실패했지만, 본래의 마음은 가난하게, 온유하게, 슬퍼할 줄 알며, 깨끗하게, 자비롭게, 평화롭게 그리고 옳게 바르게 그리스도인답게 일상을 살고 싶고 살고자 하는 것이, 본래의 우리 마음이라고 확신하며 꿋꿋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살아갑시다!! 긴 강의록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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