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조회 수 7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저는 제가 하느님의 자녀로, 수도자로 불린 순간부터 제 영혼의 심연에서부터 하느님을 향한 한없는 목마름을 느껴왔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63,2) 이 영혼의 목마름과 그리움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노래가 되고, 그 사랑의 노래가 바로 기도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영혼의 목소리로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불러드려야 합니다. 박진영은 어느 오디션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수는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아니고 노래를 불러 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정곡은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어라!>입니다. 기도하는 영혼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가수입니다. <내 마음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리라!>

 

성경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 하느님 사랑의 편지입니다. 이 사랑의 편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잘하기 위한 특별한 사랑의 묘약이나 비책은 없지만, 성경을 눈과 마음으로 읽다 보면 사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 들음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바로 기도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빠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바라시며, 마침내 사랑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기를 열망하신 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존재와 삶을 통해 아버지와 이 사랑을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고, 이 사랑의 샘에서 그 사랑을 보고 읽으며, 듣고 맛 들이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가?> 굳이 답변해야 한다면 내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그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야말로 기도가 필요 없는 분이셨지만 자주 홀로 외딴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왜 기도하는가?>라고 묻지 말고 <나는 하느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기도란 겉과 속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고백이며 사랑의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말씀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을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고,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기 위하여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당신 기도의 모범으로 보여주신 성부와의 일치는 우리를 위한 하나의 표징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기도에 우리를 합치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참여하여 아버지의 집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성령과 함께 성령을 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오직 기도함으로써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의 생애와 사도직을 통하여 점차 내화內化되고 심화深化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기도의 힘에서 발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그분이 육화하신 이 땅에 뿌리를 박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기도는 인간 실존 상황과 하나가 되어 창조의 심장인 아버지께로 나아갔습니다. 인성의 모든 것, 즉 느끼고, 생각하고, 보고 듣고 접촉하는 모든 것은 기도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인류와 예수의 연대감은 하느님과 인류와의 결합이 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평화의 성령과 함께 우리를 접촉하시는 예수의 기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결국 우리의 기도는 오늘날 하느님 자녀들의 매일 상황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며 희망의 표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1,14.16) 아버지의 끊임없는 사랑은 우리 삶의 상황 안에 성령을 체험하도록 오신 예수의 기도를 현실화시키셨습니다. 예수의 기도와 기도 생활은 그분 제자들과 우리 기도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묵상은 예수의 기도 생활을 명확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제시한 루가복음의 진전을 따라 나아갈 것입니다.

 

1) 루카 3,21~22 세례를 받으신 예수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 안에서,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목격합니다. 세례 안에서 예수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심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의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한 기도의 모범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처럼 하느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도 역시 예수처럼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 받으신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찾아오셨기에, 하느님 구원 경륜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거듭 태어났습니다. 예수의 세례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님의 기도의 물을 함께 마시도록 불림받았습니다.(요한7, 38: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품위의 쇄신된 의식을 깨닫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간 존재의 영혼, 마음, 정신과 함께 육체를 활발하게 하고 분발하게 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 2~3)

 

2) 루카 5, 15~16 따라오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위한 기도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이 대목은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이야기에 뒤따라오는 기록입니다. 치유는 예수의 한없는 자비의 표현이며 출현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는 당신 백성의 인격과 상황을 몸소 체험 하십니다. 고통받고 살아 온 나병환자의 치유에 마음을 쏟는 예수의 사랑의 원천은 아버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는 그분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체험합니다. 한적하고 외딴곳에서의 빈번한 예수의 기도하는 모습은 하느님을 만나는 여건으로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가 적합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적한 곳이 아닌 기도의 장소는 때때로 하느님의 부재이고 결여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실제적으로 한적한 장소, 광야와 사막은 하느님과의 친교의 상황을 암시하는 오래된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호세 2, 16)

 

예수께서는 의식적으로 그분의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 한적한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우주의 한적하고 고독한 장소 안에서 아버지 안에서 평화를 보고 맛 들임을 통해 세상의 외롭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친교, 그리고 우정을 향한 갈망의 무게를 더 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기도 안에서 외롭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은 아버지 사랑에서 항상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삶의 외롭고 지친 시간과 장소 안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 역시 이 세상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연대성의 표지가 됩니다.

 

3) 루카 6, 12~13: 하느님과 합일의 기도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현대 생활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올바른 식별과 적절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때론 이러한 우리의 선택과 결정은 매우 치열한 내적 고투와 고뇌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올바른 선택과 결정은 인간의 내적 지혜의 주의 집중을 요구하고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과 합일의 기도는, 예수로 하여금 많은 사람과 달리 제자들의 겉모습만을 보고 선택하기보다 그들의 내적 태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의 근원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성품과 능력 때문에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을 선택하신 스승을 거부한 유다와 배신한 베드로 사도로도 쉽게 입증되었습니다. 즉, 이 구절에 이어진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6,16)에서 곧 다가올 비극적인 사실을 암시하고 있음에도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과의 합일의 기도는 사랑스런 제자들과 벗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강한 원의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빠 하느님과 참된 사랑의 기도 안에서 나눈 대화는 우리와 함께 당신 자신의 꿈과 희망을 나누시고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낸 선물로써 이웃들을 어떤 자세와 태도로 만나고 대할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우정은 다음 말씀에서 장엄하게 선포되고 확인됩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 15~16)

 

4) 루카 9, 28-31 영광스러운 변모 순간의 기도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 있었음을 루카 복음만이 전하는 유일한 통찰입니다. 이 통찰은 모세와 엘리야, 곧 율법과 예언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을 예수의 엑소도스(탈출기; 죽음에서 부활)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루카 복음만이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변모 장면은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예고하신 뒤 8일째에 일어났습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의 수용은 인간의 삶 안에서 두렵고 힘든 순간입니다. 기도는 때때로 위기와 갈등의 시기에 중요합니다. 여기서 예수의 기도는 자기 증여의 엑소도스로 그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며 들어가는 문을 체험합니다. 삶의 여정은 하느님 마음에로 순례이고 여행입니다. 율법과 예언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바른 인생의 두 길입니다. 율법과 예언은 모든 기도의 역동적인 통찰로써, 율법은 하느님의 충실성을, 예언은 하느님의 사랑스런 섭리를 반향 합니다.

 

율법과 예언은 또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관심의 역동적인 전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계약과 계약의 충실성은 율법과 예언의 관점에서 예수의 기도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 기도는 맹목적인 광신주의 혹 고정된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해방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주 본질적 의미와 내용이 결여된 매우 인위적이고 고착적인 영적 생활에로 유혹을 받습니다. 자칫 이러한 유혹은 우리를 미신적이고 유사 영성으로, 영적 생활에로 유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깊은 반성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의 내적 탈출 사건과 해방의 관점에서 율법과 예언을 체험하도록 이끕니다. 예수의 이 기도를 통해서 예수를 죽음의 불안에서 해방시키고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시킨 것처럼, 우리의 기도도 우리가 직면한 삶의 문제와 위기 속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켜 부활의 기쁨을 맛보도록 변형하는 순간이 됩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

 

5) 루카 10, 21~22 기쁨의 기도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지고 내려온 성령의 강림은 거룩하고 참된 인간 존재가 되도록 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따뜻한 배려이며 안배이십니다. 이 영적 선물은 타인에게 축복을 빌고 그 축복을 함께 기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지와 뜻의 육화와 공현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축복과 선물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선물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축복 그 자체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것은 우리 안에 이미 들어오신 성령 안으로 흡수되고 흡인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쁨의 기도는 타인의 축복을 함께 기뻐하고 그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타인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강하게 체험하고 그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고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예수의 가족 역시 동일한 마음을 소유하였으며, 타인의 축복을 기꺼이 축하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와 함께 자신의 기쁨을 나누게 하심으로 더 큰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그것은 마리아를 축복하신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그를 축하하도록 고무시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3~45) 기쁨은 타인과 함께 나눌 때 더 커지는 법입니다. 더욱 예수의 탄생은 그의 선물을 받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기쁨의 육화입니다.

 

기쁨의 기도는 탐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12,15) 탐욕은 내적 자유를 저해합니다. 인간은 사랑의 근원이시며 희망의 보루로써 모든 창조물 안에 그분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의해서만 지배받습니다. 기뻐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것은 심각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신 하느님 사랑의 통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표시입니다. (참조; 로마 8,1~39) 기뻐하는 것은 신, 망, 애로 향해 출발할 수 있는 발판입니다. 기뻐하는 것은 선물로 받은 것을 선물로 내어놓고 나누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6) 루카 11, 1-3 주여,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는 예수의 고유한 기도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예수의 주님의 기도만큼 아름답고 완전한 기도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전통은 우리를 혼란하게 합니다. 우리는 4복음서 안에서 동일한 예수의 주님의 기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유명한 기도의 기록조차 아예 없습니다. (참조: 마태 6, 9~13, 루카 11,2~4, 마르 11, 25, 요한 17, 1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4 복음서의 깊은 숙고와 묵상은 복음 전통의 보화를 발견함으로써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공통된 요점은 예수께서 그분의 아버지를 호칭한 사실에서 발견됩니다.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표현인가! 전지전능하시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은 예수의 아버지이시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시어 우리에게 그분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도록 허락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너그러움과 관대하심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요한 20, 17)

 

예수의 부활 선물은 삶의 여정 속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체험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친교를 맺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창조물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려주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창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참조: 마태 6,24~34)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2~33)

 

예수의 사도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현존과 활동에 의해서 깊이 영감받았습니다. 예수는 신뢰와 사랑으로 그분의 아버지께 늘 다가가십니다. 아버지 홀로 예수 자신의 열정과 헌신의 원천이십니다.(마르 1, 5) 예수께서 사랑스런 아버지의 현존에 자신을 의탁하면 할수록, 그분의 품위가 드높아지고 권위가 생겨납니다. 시편 8장의 표현은 예수님의 마음이자 기도하는 영혼들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 4 -5)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전능하신 타자가 아니라 예수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동료, 동반자로써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성령은 주 예수의 모든 제자의 마음 안에서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시편은 하느님의 부성(父性)을 경축하는 예수를 통해 예수님의 기도 말이 됩니다. 삶의 모든 상황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사적 순간이 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스런 현존 안에서 깊은 안식과 평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그분께서 네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주시어 네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지는구나.>(시편 103, 1~5)

 

마르코 복음 14, 32~42절,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예수께서는 정원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 고뇌의 기도를 바치고 계십니다. 정원은 나무들이 자라고 꽃들이 피어나며 자연이 숨 쉬는 생명의 장소입니다. 아버지의 생명의 기운과 얼이 숨 쉬는 정원에서, 고뇌하시는 예수의 기도는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의 아버지를 <아바, 아빠>로써 고백하는 것이며, 생명이신 <아빠>에게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정원에서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기 위해 고뇌하고 탄식하는 것은 그 순간에 인간의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 앞에서 유혹과 시련 속에서 최종적 선택 결단을 요구받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하자고 시련이 있는가? 하느님이 아빠, 아버지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기도하셨는데 그것은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오직 기도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자만하다가 유혹에 빠지고 말았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스스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련의 순간에 오직 아버지 하느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의 끈이시고, 그분의 뜻을 수용하는 그 길만이 아빠의 사랑을 믿고 이 시련을 넘어갈 수 있다는 신뢰에 찬 절규였습니다. 저는 그렇기에 예수께서 하느님을 <Abba 아빠>라고 울부짖을 때 시편 116장을 당신 자신의 기도로 바치셨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 애원의 소리를 들어 주시니 나 주님을 사랑하네. 내게 당신의 귀를 기울이셨으니 내 한평생 그분을 부르리라.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저승의 공포가 나를 덮쳐 나는 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혔네. 이에 나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네. “아, 주님 제 목숨을 살려 주소서.”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시며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분 주님은 소박한 이들을 지켜주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내 영혼아, 주님께서 너에게 잘해 주셨으니

평온으로 돌아가라. 정녕 당신께서는 제 목숨을 죽음에서, 제 눈을 눈물에서, 제 발을 넘어짐에서 구하셨습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산 이들의 땅에서.>(시편 116, 1~9)

 

예수께서는 <Abba 아빠>라는 호칭으로 기도의 의미와 여운을 오랫동안 메아리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 46)

 

삶의 모든 상황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통하여 새롭게 거듭납니다. 기도의 순간은 물론 죽음의 순간 역시 <Abba, father, Daddy 아빠>라고 사랑스럽게, 천진스럽게 그리고 자유롭게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호칭할 수 있는 경이로운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Abba로써 예수의 Abba를 체험하고 인지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Abba’는 사랑스럽고, 부드러우며 그리고 친밀한 부자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는 애칭입니다. Abba는 예수와 아버지 하느님 사이의 감미로운,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당신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할 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기도의 방법 혹 기도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는 당신의 아빠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신뢰의 언어를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꿈, 희망 그리고 이상을 나누셨습니다. 그분은 인내, 우정 그리고 사랑의 일로써 기도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과 끊임없이 사랑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당신을 부르고, 아버지와 아들의 성숙한 사랑의 교류와 태도를 함께 나누십니다. 우리의 아빠로서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죄와 한계, 약함을 없애시려는 이상과 꿈을 가지신 예수와의 친교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평화, 용서, 화해와 정의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기도함으로써 인간 영혼이 신적 지위로 격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 영혼은 성령에 의해서 변형됩니다. <Abba>를 향해 기도하는 것은 아빠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 즉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죄의 용서 그리고 유혹에서 보호를 보증해 주고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일상의 걱정과 근심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자기 자신을 체험할 때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1~ 33)

 

7) 루카 18, 1 언제나 기도하라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기도는 용기입니다. 많은 시간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텅 빈 것처럼 느껴집니다. 때론 우리의 선한 지향과 진실한 청원이 기도 안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끈질기게 인내하거나 항구하지 못하고 쉽게 실망해 버립니다. 기도할 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충실성을 신뢰하는 것은 항구하게 인내하고 기다리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위대한 신앙은 사실 기도의 결실이며 열매입니다. 위대한 신앙은 평온한 시간보다 심각한 시련과 위기의 순간에 그 진실성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됩니다.

 

처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항구하고 집요하게 하느님을 붙들고 늘어지며 응답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 안에서 변화를 위한 시간이 되고 기회일 수 있습니다. 변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마음일지 모릅니다. 기도는 항구하게 기다리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변형되어 갑니다.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고, 하느님의 섭리와 현존의식 안에서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8) 루카 22, 31-34 나는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기도의 긴장성은 루카의 유일한 사료이기에 더욱 돋보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셨듯이.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이 예수의 사도직이라는 사실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참조: 히브 5, 1~19)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 8, 6)

 

예수의 기도는 위대한 신앙의 백성이 된 우리를 격려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 한계, 약함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약하고 유한하며 죄인이라 할지라도 Abba 안에서 신뢰하고 믿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로, 우리가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편에서 우리에 대한 자비의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시몬은 자신의 실패를 경험한 뒤, 자신의 동료나 형제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도록 재차 불림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불충실은 계속된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께 대한 신뢰의 충실성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패는 Abba의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강함의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 10)

 

9) 루카 22, 39-46 올리브 산에서 기도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그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어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올리브 산에서 고뇌의 기도는 예수께서 얼마나 처절하게 아버지를 신뢰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기도의 실제적 실례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기도하는 동안 Abba의 말씀을 듣는 자만이 드릴 수 있는 탄식의 기도입니다.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원의를 순종하겠다는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대단히 격앙된 감정을 감추기보다 솔직하고 진솔하게 토로합니다. 이 격앙된 감정은 예수의 고통의 깊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의 내적 상태는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마르14,34) 그러나 이 격렬한 고뇌의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예, 제가 이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하고 대답하십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은 탐욕과 이기심의 전환된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근본적으로 원하셨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 역시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를 원하시지 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원의보다 아빠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원하셨을 뿐입니다. 그 까닭은 십자가가 당신 소명인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는 고통을 위한 고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 자체를 위한 고통이란 한낮 자기 학대일 뿐이며, 있다면 다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자 하는 사랑의 표현뿐입니다.

 

매일의 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꿈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고통이 수반되는 삶입니다. 삶의 고통과 삶의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백성과 하나가 되길 원하시는 예수의 삶을 바라보면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굳건한 신앙과 사랑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낄 뿐입니다. 참사랑은 사람이 의지로써 타인의 고뇌의 쓴 물을 마실 때 파생합니다. 세상에 짓눌린 예수는 우리네 삶의 고통과 고뇌를 그 자신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정녕 저희 영혼은 먼지 속에 쓰러져 있으며 저희 배는 땅바닥에 붙어 있습니다.>(시44, 26)

 

고뇌의 기도는 성령 안에서 위대한 사랑의 기도가 됩니다. 예수의 고뇌의 기도는 우리의 고통 한가운데서 울부짖으신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분의 눈물은 참된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요한 11, 34)

 

10) 루카 23, 46 십자가상에서 기도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예수의 생생한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시고 고통받으신 예수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십자가는 그분을 거부한 자들은 물론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분 자신을 건네주신 사랑과 용서의 제단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상에서 백성을 위한 기도는(루카 23, 21) 모든 이의 용서를 아빠 하느님께 간구하신 용서의 기도입니다. (루카 23, 3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지금 그 말씀은 하느님께 울부짖음으로써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바쳤던 기도는 불의와 폭력에 좌절되어 그분 자신을 십자가에 이끌게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가장 혹독한 두려움 안에서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 용서, 자비, 자유 그리고 사랑의 존재이신 그분의 초대를 받게 됩니다.

 

이제 그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과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무것도 남김없이 빼앗기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도직을 시작하실 때 받으셨던 그분의 영마저도 마지막 선물로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십니다. 마르코 15, 37절에서 예수는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그분의 고통, 그분의 고뇌,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로서의 그분의 체험, 마르 15, 34절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는 그분의 마지막 위대한 사랑의 노래, 기도입니다.

 

이 순간 <그들이 숨겨놓은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시편31,5) 라는 외침이 온 우주에 울려 퍼지고, 곧이어 이 사랑의 외침은 당신의 외 아드님을 집으로 받아들이신 Abba의 침묵으로 변조되어 온 우주를 휘감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이제 그 말씀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드러난 아빠 하느님의 상처, Abba의 상심은 온 우주의 무거운 정적 속에 영원한 사랑의 노래가 되어 메아리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 이제 우리 또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노래를 함께 부르도록 합시다. 소리 높여 이 사랑을 노래하고 찬송합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어라!

 

마지막으로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이서 3, 12~17절을 읽으면서 우리의 사랑 노래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기도 안내 6. 복음 구절

(드 멜로의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이 방법으로 기도를 하려면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질문이나 명령 등을 기록한 목록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를 따르라.... 와서 보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깊은 곳에다 던져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깨어 기도하라>와 같은 표현들을, 질문으로는 <너는 나를 누구하고 하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너는 믿느냐?...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낫기를 원하느냐?> 등등.

 

이 목록에 있는 질문이나 초대의 말에서 하나를 선택한 다음, 이 기도 방법에 따라 묵상해 보십시오.

 

당신 앞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서 계시다고 상상하십시오... 그런 다음 예수께서 당신에게 이런 질문이나 초대의 말 중의 하나를 말씀하신다고 상상하십시오. <와서 보라... 나를 사랑하느냐?> 등등.

 

이 질문이나 초대에 대해서 즉시 대답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그 말을 계속 반복하신다고 상상하십시오.... 그 말씀이 당신의 온 존재 속에 울려퍼지게 하십시오...

 

그 말들을 계속 들으십시오. ...그 말들이 당신에게 도전을 하고, 일깨우고, 대답을 하도록 자극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가 없게 될 때까지. 그런 다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성서를, 특별히 신약성서를 열심한 마음으로 자주 읽는 것은 여러분의 기도 생활과 삶을 놀랄 정도로 풍요롭게 해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구절들을 통해서 특별한 방법으로 여러분과 대화하신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실망할 때와 도움이 필요할 때 또는 기쁠 때나 고독할 때,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속에다가 다시금 이 말들을 속삭이시면서 그 말을 통해서 여러분과 관계를 맺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성서의 말씀을 설명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불탔듯이,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듯 뜨겁게 될 것입니다. 

 


  1. <아름다운 마무리2: 실제적인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응답>

    Date2021.11.08 By이보나 Views50
    Read More
  2. 연중 제32주일 마르코 12, 38 ~ 44

    Date2021.11.06 By이보나 Views33
    Read More
  3.  <아름다운 마무리 1: 그리스도교 죽음의 신학적 의미>

    Date2021.11.01 By이보나 Views55
    Read More
  4. 연중 제31주일 마르꼬 12, 28 ~ 34

    Date2021.10.31 By이보나 Views33
    Read More
  5.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연중 제30주일): 마테오 28, 16 - 2

    Date2021.10.23 By이보나 Views39
    Read More
  6. 연중 제29주일 마르코 10, 35 – 45

    Date2021.10.16 By이보나 Views51
    Read More
  7. 연중 제28주일: 마르코 10, 17 - 30

    Date2021.10.09 By이보나 Views57
    Read More
  8. 연중 제27주일: 마르꼬 10, 2 - 16

    Date2021.10.03 By이보나 Views79
    Read More
  9. 연중 제26주일: <마르코 9, 38 – 43. 45. 47 – 48>

    Date2021.09.26 By이보나 Views55
    Read More
  1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Date2021.09.18 By이보나 Views63
    Read More
  11. 기도학교 강의 9: 루가 복음에 나오는 기도

    Date2021.09.16 By이보나 Views74
    Read More
  12. 연중 제24주일: 마르꼬 8, 27 - 35

    Date2021.09.12 By이보나 Views54
    Read More
  13. 연중 제23주일: 마르꼬 7, 31 - 37

    Date2021.09.04 By이보나 Views63
    Read More
  14. 기도학교 강의 8: 기도의 열매

    Date2021.09.02 By이보나 Views74
    Read More
  15. 연중 제22주일: < 마르코 7, 1 – 8. 14 – 15. 21 – 23 >

    Date2021.08.29 By이보나 Views46
    Read More
  16. 기도학교 강의 7: Lectio Divina를 통한 기도의 단계 2

    Date2021.08.26 By이보나 Views83
    Read More
  17. 연중 제21주일: 요한 6, 60 – 69

    Date2021.08.21 By이보나 Views64
    Read More
  18. 기도학교 강의 6: Lectio Divina를 통한 기도의 단계 1

    Date2021.08.19 By이보나 Views76
    Read More
  19. 성모 승천 대축일: < 루카 1, 39 – 58 >

    Date2021.08.14 By이보나 Views44
    Read More
  20. 기도학교 강의 5: 하느님 말씀과 기도의 기본 구조

    Date2021.08.12 By이보나 Views67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3 Next
/ 23